[편집국에서] '동학개미'가 정말 승리하려면 / 최우성

최우성 2021. 1. 1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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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코스피가 3100선을 넘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1층 전광판 모습. 사진 한국거래소 제공

최우성ㅣ산업부장

바이러스 치하에서 맞이한 2021년 벽두부터 주식시장이 연일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간계를 침탈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시위라도 하듯, ‘개미’들의 움직임이 특히 분주하다. 이번주 들어 사흘 새 개인투자자들은 유가증권시장에서 7조원어치 주식을 순매수했다.

거품 논란도 뜨겁다. 코스피 시가총액은 국내총생산(GDP)을 가뿐히 넘어선 상태다. 기초체력에 비해 과대평가됐다는 목소리가 뒤따른다. 또 다른 평가도 가능하다. 현행 코스피는 1980년 1월4일 주가를 기준점(100)으로 삼은 상대값이다. ‘코스피 3000’은 이 기간 가격이 30배 뛰었다는 말과 같다.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1980년에 견줘 48배(원화 기준), 1인당 소득 잣대로는 36배다. 덩치가 아니라 체질(이익)이 주가를 좌우하는 법이지만, 허상의 거품 수치라고만 단정하긴 어렵다.

정작 거품이냐 아니냐의 논란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봐야 할 건 따로 있다. 지금 주식시장은 짜임새와 결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이야기가 움트는 무대라서다. 주식시장을 달구는 수많은 개인투자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연령이나 직업, 소득수준과 같은 가림막을 걷어내면, 다층적 정체성을 지닌 ‘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월급쟁이(노동자)이자 ‘동시에’ 투자자인 사람도 많을 테고, 때론 이해관계가 엇갈린 세입자와 건물주로 맞서지만 투자자라는 한 지붕 아래 모인 사람들도 있을 게다. 현대인의 일상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야멸찬 선택지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이것이기도 저것이기도 한 하이픈(―)의 삶이다. 이제 노동자와 소비자, 투자자는 한 사람의 여러 얼굴일 뿐이다.

성숙한 자본시장이라는 그럴싸한 문패를 단 금융화(금융자본주의)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정체성의 무게중심은 투자자 쪽으로 한 발 더 옮겨가기 마련이다. 대체로 앞선 경험을 한 나라들의 공통된 궤적이다.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고용·지역·성·직업 등 사회구성원의 지위를 가르던 종래의 낯익은 경계선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자리엔 낯선 경계선이 그어진다. 이익배당을 챙길 권리 소유 여부에 따라 새로운 관계맺음이 등장하고, 사회 갈등의 발화점도 개인의 책임(투자)으로 옮겨간다.

새해 벽두의 요란한 주식시장은 ‘투자자 사회’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투자자 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섣부른 예단은 피하는 게 옳다. 투자자 사회에선 으레 길항의 힘이 작용하는 까닭이다. 직간접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보수정당 지지 성향이 강화된다는 실증 연구 결과가 미국에선 여럿 있다. ‘내 돈을 건’ 투자자의 속성상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을 희구하고 기업의 자유로운 영리 행위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다. 2016년의 폭스콘테크놀로지는 많은 이야기를 품은 현장이다. 애플의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던 이곳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다 못해 잇달아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세상은 분노했다. 하지만 기다린 건 반전. 폭스콘테크놀로지를 소유한 훙하이정밀공업의 2대 주주는 미국 노동자 2000만명 이상의 여윳돈을 굴리던 거대 뮤추얼펀드 뱅가드그룹이었다. 분노하는 사람과 투자 열매를 챙긴 사람은, 많은 경우 동일인이었다.

정반대의 시나리오도 그려볼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개인투자자가 주식시장으로 뛰어든다는 건 투자상품(기업)을 겨냥한 촘촘하고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가 늘어난다는 뜻도 된다. 특히 간접투자에서 직접투자로 자금이 대거 옮겨가는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흐름은 한 발 걸친 방관자가 아니라 액티브 플레이어가 투자자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기업의 사업 전략을 냉정히 따져볼 뿐 아니라 낡은 경영 관행 등 기업 가치를 갉아먹는 일체의 행위에 매서운 회초리를 들이댈 강력한 압력 집단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업에, 결과적으론 투자자 자신에 보탬이 되는 일이다.

주식시장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는 이 땅의 개인투자자들은 언젠가부터 ‘동학개미’란 이름을 얻었다. 120여년 전 갑오년을 뜨겁게 달군 동학농민군이 꿈꾼 세상이 반외세·반봉건 아니었던가. 지금은 단지 우리 기업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바꾸고 혁신시킬 때다. 그래야 진짜 동학개미의 승리다.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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