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자력갱생' 노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길윤형 2021. 1. 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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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알고싶어]정치 BAR_길윤형의 알고 싶어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12일 제8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박수를 받으며 당대회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시작된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가 12일 폐막식을 끝으로 8일 동안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이번 8차 당대회는 20일 취임하는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를 상대로 북한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까하는 점 때문에 시작 전부터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 당 대회에서 눈에 띄는 북한의 노선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9일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공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당 직책은 총비서·이하 직함은 국무위원장으로 통일)의 사업총화 보고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새 승리에로 인도하는 위대한 투쟁강령’을 통해 “불법무도하게 날뛰는 적대세력들과 강권을 휘두르는 대국들에 대하여서는 ‘강 대 강’으로 맞서는 전략을 일관되게 견지하여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말은 강했지만, 남쪽에는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까운 시일 안에 북남관계가 다시 3년 전 봄날과 같이 온 겨레의 염원대로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에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고, 미국에 대해선 “새로운 조-미 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데 있다”고 강조하는 등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아 걸지는 않았습니다. 북이 먼저 관계 개선을 위한 선의를 보이진 않겠지만, 상대가 태도 변화를 보이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소극적’ 의지를 밝힌 셈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번 당 대회는 미국 등을 향한 대외용 메시지보다 지난 한해 동안 제재, 코로나19, 수해 등 ‘3중고’로 큰 고통을 받아온 북한 내부를 다잡기 위한 ‘대내용 메시지’를 발신하는 자리였다는 게 개인적 느낌입니다. 이는 <노동신문>이 13일 공개한 김정은 위원장의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한 결론’이라는 연설문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이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이번 8차 당대회의 결론을 “우리 혁명 앞에 나선 중대한 역사적 과제는 이민위천, 일심단결, 자력갱생을 다시 깊이 새기고 더 높이 들고 나갈 것”이라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당대회의 3대 키워드가 이민위천, 일심단결, 자력갱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민위천(以民爲天)이란 ‘백성을 하늘 같이 소중히 여긴다’는 뜻으로 북한은 이를 “전당이 인민을 위하려 복무함”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심단결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단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민위천과 일심단결은 북한 앞에 놓인 대내·대외적 어려움에 맞서는 조선노동당의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국가 정책일 순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8차 당대회 결론 가운데 더 중요한 말을 꼽자면 ‘자력갱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언제부터 이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파국에 이르는 2019년 2월28일로 시계를 돌려야 합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2016년 이후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부과한 5개의 결의 가운데 민생과 관련되는 내용을 해제하는 대가로 북한의 가장 큰 핵시설이라 알려진 영변 지구를 폐기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 핵시설 외에 다른 시설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가 북이 이에 응하지 않자 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가운데)이 2019년 3월1일 0시15분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한밤 기자회견을 열어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설명을 반박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노이 결렬을 ‘다음 대화를 위한 일시적 어려움’으로 받아들인 한-미와 달리 ‘고립된’ 북한의 전략적 평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노이 회담이 끝난 뒤, 북이 자신들의 실망감을 공개 표명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1일(현지시각) 0시15분께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로 기자들을 불러 모아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북-미 간에)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지 말하기 힘들다”는 장탄식을 남겼습니다. 보름 뒤인 15일엔 최선희 북 외무성 부상이 <에이피>(AP) 통신, <타스> 통신 등을 불러 모아 “미국의 강도 같은 입장이 결국 상황을 위험에 빠뜨렸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북이 하노이 이후 수정된 대외 전략을 공개한 것은 그해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를 통해서였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12일 공개된 시정 연설을 통해 하노이 파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판단과 함께 앞으로 대외 정책 노선을 나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에 조금이라고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아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 핵무장력의 급속한 발전현실 앞에서 저들의 본토안전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은 회담장에 나와서 한편으로는 관계개선과 평화의 보따리를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제재에 필사적으로 매여 달리면서 어떻게 하나 우리가 가는 길을 돌려세우고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야망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 리익에 배치되는 그 요구를 그 무슨 제재해제의 조건으로 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와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 있으며 적대세력들의 제재 또한 계속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대세력들의 항시적인 제재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왔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에 만성화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며 혁명의 전진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힘으로는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세력들에게 있어서 제재는 마지막 궁여일책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인 것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도 방관시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맞받아나가 짓뭉개버려야 합니다. (중략) 우리에게는 최단기간 내에 나라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계 선진수준에로 도약할 수 있는 자립적 발전능력과 기반이 있습니다. 수십년 간 다져온 자립경제토대와 능력 있는 과학기술 역량, 자력갱생을 체질화하고 애국의 열의로 피 끊는 영웅적 인민의 창조적 힘은 우리의 귀중한 전략자원입니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로선을 튼튼히 틀어쥐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해 나갈 때 우리는 남들이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힘으로 놀라운 발전상승의 길을 내달리게 될 것입니다.” (중략)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진행된 제2차 조미 수뇌회담은 우리가 전략적 결단과 대용단을 내려 내짚은 걸음들이 과연 옳았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자아냈으며 미국이 진정으로 조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이 있기는 있는가 하는데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한 계기로 되었습니다. (중략)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 수뇌회담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로서는 한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그 무슨 제재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 볼 것이지만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분명 힘들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를 2017년 10월29일 북한이 쏘아 올린 화성 15형의 발사 성공, 즉 “우리 핵무장력의 급속한 발전현실 앞에서 저들이 본토안전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대화에 나서는 미국의 자세는 겉으로는 “관계개선과 평화의 보따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일뿐 진심으로 북과 평화와 공존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김 위원장은 보고 있습니다. 북이 이를 확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이 “전략적 대용단을 내려” 북한 핵시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영변을 내놓겠다고 했는데도 미국이 제재 해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변을 내놓았는데도 제재 해제가 되지 않았다면,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북한이 받은 충격은 이런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 있으며 적대세력들의 제재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의 제재가 ‘상수’라면, 북이 택할 수 있는 출구는 ‘자력갱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 위원장은 “우리에겐 자립적 발전능력과 기반이 있다”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할 때 남들이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힘으로 놀라운 발전상승의 길을 내달리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면서도 북은 미국을 향해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 볼 것”이라 말합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기묘한 브로맨스’에 실낱 같은 기대를 걸어 본 것입니다.

2019년 6월30일 판문점에서 깜짝 회담에 나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북한은 정말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에서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친 뒤 2019년 6월29일 오전에 올린 트위터 초청에 응해 이튿날인 30일 ‘깜짝 남-북-미 판문점 만남’에 응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만남에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멋진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북한이 얻은 성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북-미는 하노이 이후 멈춰졌던 실무회담에 나서지만, 그해 10월 초 노르웨이 스톡홀름에서 이뤄진 실무회담은 6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고했던 ‘연말’까지라는 시한이 끝나자, 김정은 위원장은 조금 더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그게 됩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 그해 12월2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입니다. 이 회의의 결과를 전하는 <조선중앙통신>의 문서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조선노동당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성된 현 정세의 추이를 분석하시면서 미국의 본심은 대화와 협상의 간판을 걸어놓고 저들의 정치외교적 리속을 차리는 동시에 제재를 계속 유지하려 우리의 힘을 점차 소모 약화시키자는 것이라고 락인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우리 국가의 안전과 존엄 그리고 미래의 안전을 그 무엇과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임을 더 굳게 결심하였다고 강조하시었다. 조선노동당 위원장 동지께서는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 리익과 배치되는 요구를 내대고 강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조-미 간의 교착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어 있다고 하시면서, 근간에 미국이 또다시 대화재개 문제를 여기저기 들고 다니면서 지속적인 대화타령을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애당초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철회하고 관계를 개선하며 문제를 풀 용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우리가 정한 년말 시한부를 무사히 넘겨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 수 있는 시간벌이를 해보자는 것일 뿐이라고, 대화 타령을 하면서도 우리 공화국을 완전히 질식시키고 압살하기 위한 도발적인 정치군사적 경제적 흉계를 더욱 로골화하고 있는 것이 날강도 미국의 이중적 행태라고 못 박으시였다. (중략) 세기를 이어온 조-미 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되어 명백한 대결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핵문제가 아니고라도 미국이 우리에게 또다른 그 무엇을 표적으로 정하고 접어들 것이고 미국의 군사정치적 위협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지만 연초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북한 뿐 아니라 세계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각자 국내 문제에 대응하느라 정신 없던 남북과 미국은 대화다운 대화 한번 못 해보고 2020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그 사이 제재, 코로나19, 대홍수라는 ‘3중고’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2021년 새해 벽두에 연 제8차 당대회의 결론은 지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 등을 통해 확인된 ‘자력갱생’ 노선의 계승이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수해현장을 한 달 만에 다시 찾아 복구 상황을 현지 지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제8차 당대회를 통해 자력갱생 노선을 ‘재확인’했다는 것은 앞으로 북-미, 남북관계에 여러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북한의 이 결정은 2019년 2월28일 ‘하노이의 비극’을 겪은 북한이 2년에 걸친 심사숙고 끝에 내린 ‘전략적 결단’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굳어진 마음을 풀기는 좀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권 일부에선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론’까지 꺼내들고 있지만, 2018년 초와 같은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시작되려면 북한의 경계심을 풀어줄 한국과 미국의 상당한 수준의 전략적 결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제재 해제 대신에 새로 내놓은 요구는 적대시 정책의 철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19년 봄 이후 북이 남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한국이 진행 중인 F-35 등 여러 ‘첨단 군사장비 도입’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입니다. 북한이 두 가지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문제에서 한-미가 북한이 이해할 만한 선 조처를 취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남북, 북-미 대화는 이뤄지기 힘들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북한은 3월로 예정된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동향을 예의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훈련이 치러진다면 상응하는 북한의 대응행동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북은 제8차 당대회를 통해 공을 한-미에게 넘겼습니다. 이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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