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청년 예술노동자의 험난한 여정 [만화로 본 세상]
2021. 1. 13. 08:42
[주간경향]
지하주차장에 컨테이너가 2개 놓여 있다. 한 젊은 여성이 그 앞에 서서 컨테이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자리〉(김소희·만만한책방)의 표지다. 표지 속 여성은 뒷모습뿐이라 표정을 알 수 없다. 만화를 읽기 전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지만, 다 읽고 난 후에 다시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건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지하주차장에 컨테이너가 2개 놓여 있다. 한 젊은 여성이 그 앞에 서서 컨테이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자리〉(김소희·만만한책방)의 표지다. 표지 속 여성은 뒷모습뿐이라 표정을 알 수 없다. 만화를 읽기 전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지만, 다 읽고 난 후에 다시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건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자리〉는 자전적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 송이와 순이는 김소희 작가와 고정순 작가를 모델로 했다. 두 사람은 만화가로,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다. 책 속에서 송이와 순이는 미대를 졸업하고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작업실을 구해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매달린다. ‘작가’가 아닌 ‘작가 지망생’으로 불리는 시간이다.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만든 돈은 300만원.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으로 서울에서 두 사람이 머물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분식 노점 주인을 통해 찾아간 첫 집은 지하였다. 지하지만 20평, 제법 넓은 곳인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방이 아니라 목욕탕 자리였다. 깨진 타일이 흐트러져 있는 허물다 만 탕이 두 사람을 맞았다.
송이와 순이는 오래전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곳을 둘만의 습작으로 채워 보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겨울이 오자 두 사람은 어떠한 의미 부여도 최소한의 주거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가능한 일임을 철저히 깨닫는다. 그곳은 물도 안 나오고, 난방도 되지 않았다.
부동산을 찾았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40만원은 지상에서는 없다는 말을 듣는다. 500만원에 45만원, 대신 관리비가 없는 집을 소개받는다. 지붕이 비스듬하고, 오각형의 창문이 있는 곳. 빨강머리 앤의 방을 떠올리게 하는 예쁜 곳이라 두 사람은 신이 났다. 그러나 서울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 집에도 ‘싼 이유’가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온갖 불법 임대와 건축법 위반의 향연을 보게 된다. 정말 별집이 다 있다. 그런 집들이 모두 월세 30만원 이상이다.
송이와 순이는 7년 동안 10번 이사한다. 조금이라도 나은 집을 찾아보려고, 혹은 그나마 그런 집에서도 살 수 없어서. 창작 노동을 하고 있지만 ‘작가 지망생’의 시간은 두 사람의 자존감도 갉아먹는다. 두 사람은 스트레스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추정된 병을 얻는다. 그러나 〈자리〉는 극한의 시간에 대한 기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자리를 지우려는 세상에서, 끝끝내 자기 자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여정이 험난한 이유는 주거문제만이 아니다. 청년 예술노동자를 착취하는 노동시장의 문제도 있다. 둘은 “말도 안 되는 작업비”에 일해주고, 쉽게 잘리고, 성희롱도 당한다. 죽도록 일해 쥐꼬리만큼 벌고 월세 내느라 헉헉대는 악순환의 구조가 사람을 잡는다. 그 고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에 시달린다.
〈자리〉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 만화 제작 지원 사업’의 선정작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 사업은 소위 시장에서 팔리는 만화가 아닌 다양한 만화 창작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선정되면 1년간 작업에 힘쓸 수 있는 비용이 지원된다. 창작은 고통을 견뎌야 하지만, 그것이 배고픔과 주거불안의 고통은 아닐 것이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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