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코뿔소 커플의 권태기 탈출 작전

정지섭 기자 2021. 1. 1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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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짝짓기 시도 후 1년 5개월째 '데면데면'
밀렵으로 인한 멸종위기에 번식율도 낮아
공간과 동선 세밀히 짜서 '2세 탄생' 재도전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2019년 8월 26일 오후 1시 37분. 서울대공원 동물원 대동물관 사육사들의 눈이 일제히 CCTV로 쏠렸습니다. 흥분과 적막이 교차하는 분위기 속에 시선을 사로잡은 주인공은 화면 속 흰코뿔소 두 마리. 일곱살 터울의 연상연하 커플인 암컷 초미(22살)과 수컷 만델라(15살)였습니다.

일곱살 연상연하 커플인 흰코뿔소 암컷 초미(왼쪽)와 수컷 만델라가 과천 서울대공원 코뿔소 우리를 거닐고 있다. /서울대공원

만델라가 두 앞다리를 초미의 등위에 얹고 뒷다리를 상대방의 엉덩이쪽으로 바짝 갖다붙였습니다. 대형 초식동물의 전형적인 짝짓기 포즈입니다. 오랫동안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였던 이 커플 사이에서 마침내 사랑의 불꽃이 튄 것입니다. 멸종위기에 처한 종의 대를 잇기 위해 정성들여서 합방 작전을 준비해온 동물원 관계자들이 한껏 고무됐습니다. 하지만 이날 튄 사랑의 불꽃은 아쉽게도 점화(點火)로 이어지는 데 실패했습니다.

서울대공원 코뿔소 가족의 청일점이자 막내인 만델라가 타이어 구조물에 뿔을 비비고 있다. /서울대공원

이날 만델라가 초미의 뒤로 접근해 올라타는 이른바 마운팅(Mounting) 장면은 무려 열 두 차례나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각 동작들을 분석한 결과 임신을 확신할 수 있을만한 ‘결정적 순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서로에게 관심을 보였으니,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동물원 사람들은 낙관했죠. 그렇지만 그날 이후 식어버린 사랑의 불꽃은 아직까지 살아나지 못했고, 커플은 긴 권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올해로 마흔살이 된 서울대공원의 최고령 코뿔소인 암컷 수미. /서울대공원

코뿔소 우리에서 벌어진 이 같은 상황은 코뿔소를 보유하고 있는 전세계 동물원들의 공통된 고민의 단면입니다. 코뿔소는 흰코뿔소·검은코뿔소·인도코뿔소·자바코뿔소·수마트라코뿔소의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모두 멸종위기종입니다. 뿔을 노린 밀렵수요가 좀처럼 줄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코뿔소를 전시동물로 보유하고 있는 세계 각지의 동물원은 그래서 종 보전 및 2세 번식에 대한 책임감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느 동물에 비해 번식 성공율이 낮다보니 새끼를 보는게 정말 어렵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 나카송골라에 있는 지와 코뿔소 보호구역에서 남부 흰코뿔소 무리들이 진흙 목욕을 즐기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서울대공원 코뿔소사에는 초미·만델라 커플 말고도 초미의 친모인 수미도 있습니다. 1984년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문을 열 때부터 이곳을 지킨 터줏대감입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장모(또는 친정엄마)와 함께 사는 연상 연하 부부인 셈이죠. 코뿔소는 암컷과 새끼들은 무리를 이루고, 수컷은 보통 단독 생활을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제대로 분석하고 행동 패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번식을 성공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동물원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2019년부터 코뿔소들에 대한 세밀한 모니터링에 들어갔습니다. 사고 방지용으로 실내 방사장과 야외 우리에 달아놓았던 CCTV를 업그레이드하고, 수시로 이들의 행동을 관찰했습니다.

지난 2년간 축적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몇가지 점이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우선 2019년 8월 한 차례 번식을 시도했던 초미와 만델라가 작년에는 단 한 차례도 애정행각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코뿔소는 통상 7~8월이 번식철입니다. 암컷의 신체 일부가 변화해 ‘사랑을 나눌 준비가 됐다’는 시그널을 수컷에게 보내서 반응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지난해 초미의 몸에 신체적 변화가 일부 관찰됐고 만델라도 관심을 보였으나 짝짓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주로 보인 모습은 남매, 혹은 남사친·여사친에 더 가까웠죠.

남아프리카공화국 필라네스버그 사파리공원에서 수의사들이 코뿔소의 뿔을 잘라내기 위해 마취제를 투여하고 있다. 뿔을 노리고 밀렵꾼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한 극단적 고육책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반면 만델라와 수미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둘이 코를 땅에 닿을만치 바짝 붙이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박치기를 할 듯 기싸움을 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연출됐습니다. 친모녀 지간인 수미와 초미가 바짝 붙어다니는 경우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런 행동양태로 미뤄 짐작컨대 코뿔소 부부의 권태기는 가장 나이든 암컷인 수미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왔습니다.

인도 아삼주의 포비토라 야생보호구역에서 인도코뿔소 한 마리가 물가를 거닐고 있다. /EPA 연합뉴스

유럽동물원수족관협회에서 분석한 ‘흰코뿔소 사회적 구성에 따른 번식장해 요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수컷이 한마리 뿐이고 암컷이 여러 마리일 때 짝짓기 모드로 돌입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어린 시기에 새로운 무리에 합사되면 이성 코뿔소라도 형제·자매로 익숙해지면서 성적 대상으로 여기기가 어렵게 된다. 셋째, 가장 나이가 많은 암컷은 어린 암컷을 자신의 보호 하에 통제하려 들게 되며, 설사 어린 암컷이 성적으로 성숙해지더라도 보호 본능을 발동한다. 이로 인해 성체 수컷과의 만남을 막고, 심지어 수컷을 공격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든 연장자로서의 보호·통제 본능이 오히려 피끓는 청춘남녀들간의 뜨거운 사랑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분석은 서울대공원 코뿔소들의 행동 패턴을 읽는데 매우 유용했습니다 만델라가 과천으로 온 것은 일곱살 때인 2011년입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이제 갓 사춘기 소년에 접어들 무렵에 암컷들로만 이뤄진 코뿔소판 아마조네스로 온 것이죠. 음기(陰氣)에 눌렸던 것일까요. 만델라가 보다 과감하게 연애에 나서지 않는 것은 이런 성장환경과도 무관치 않아보입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해서 대공원 측은 올해에는 만델라와 초미 커플이 최연장자 수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동선과 공간 배치를 세밀하게 짤 계획입니다.

서로 코뿔을 부비고 있는 만델라와 초미. /서울대공원

이렇다보니 마치 수미가 젊은 커플의 2세 번식을 막는 장본인처럼 보일 법도 합니다. 하지만 동물원 사람들은 서울대공원 역사에서 수미의 공(功)은 높이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1997년 2월 지금의 초미를 열다섯 달동안 뱃속에 고이 품고 내보내, 그 어렵다는 코뿔소 동물원 번식을 가능케 한 주인공이기 때문이죠. 무럭 무럭 자라난 아기 코뿔소는 IMF외환위기로 신음하던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됐습니다. 수미를 격려하고 응원해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병마와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할머니 나이에 접어든 수미는 지난해 난소 부위에 종양이 발견돼 여러 차례 특별 치료를 받으며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대공원 코뿔소 우리에는 식구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1985년생 암컷 ‘코순이’입니다. 나머지 코뿔소와 혈연관계는 없지만, 초미에겐 이모역할을, 수미에겐 함께 늙어가는 동년배 역할을 했던 코순이는 2019년 12월 생을 마감했습니다. 코순이의 사인이 바로 난소 종양이었습니다. 수미를 보는 동물원 사람들의 시선이 유달리 애틋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저돌성과 불굴의 용기를 가진 동물 코뿔소는, 인간의 물욕으로 절멸의 위기에 맞닥뜨렸습니다.

밀렵으로 어미를 잃은 새끼를 돌봐주는 ‘코뿔소 고아원’의 슬프면서도 사랑스러운 일상(출처 Dodo)

https://www.youtube.com/watch?v=3OZ-j0ow3bc

아프리카의 일부 자연보호구역과 동물원에서는 밀렵을 막기 위해 코뿔소의 상징과도 같은 뿔을 잘라내는 극단적인 고육책까지 동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코뿔소들이 다시금 아프리카 사바나와 동남아 정글을 마음놓고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코뿔소를 돌보는 이들의 손길도 지구촌 코뿔소 보호에 의미있는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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