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북국의 침엽수림 부럽지 않다..마을을 살린 치유의 숲
<92> 장성 서삼면, 축령산 편백숲
“부지런히 눈을 치우고 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지난 7일 장성 서삼면 추암마을에서 만나기로 한 ‘백련동편백농원’ 대표는 마을로 가는 도로가 막혔다고 전했다. 내심 멋진 설경을 기대를 했던 터라 조바심이 나는데, 안타깝지만 어쩌겠냐는 듯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담담했다. 수도권에서는 퇴근 시간에 폭설이 예보돼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당국의 늑장 대처로 생고생 끝에 겨우 집에 도착했다는 울분 섞인 무용담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사는 지역과 사람 구경하기 쉽지 않은 산골마을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연 현상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는 이토록 차이가 컸다.
은빛 찬란한 상록수림…'조림왕'이 준 선물
8일 오전, 호남 서부지역에는 또 눈이 내린다고 예보돼 있었지만 장성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기만 했다. 이틀간 내린 눈이 온 산천을 뒤덮어 세상은 백과 청, 단 두 개의 색깔로만 보였다. 세상살이도 이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게 참 맑은 풍경이다.
추암마을로 가는 도로에도 하얗게 눈이 얼어붙었지만, 제설차로 어느 정도 치워놓은 상태라 운행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염화칼슘을 들이부어 말끔하게 정리된 고속도로에 비하면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하루 이틀간 불편을 참은 덕에 환경오염은 그만큼 줄일 수 있었다.
축령산 남쪽 기슭 추암마을은 70여가구가 해발 300m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산촌(山村)이자 산촌(散村)이다. 정강이까지 빠질 정도로 내린 폭설이 남루한 풍경을 모두 가린 때문일까, 궁벽한 지형임에도 가난의 흔적보다는 새집이 많이 보인다. 통유리창 카페며 산뜻한 색상을 자랑하는 펜션, 고급스러운 외관의 별장 주택이 도로 주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모든 게 독보적 ‘조림왕’ 춘원 임종국이 일궈낸 편백나무숲(삼나무가 3분의 1가량 섞여 있지만 통상 ‘편백숲’으로 부른다) 덕택이다.
임종국(1915∼1987) 선생은 반평생 나무를 심고 숲과 함께 살다가 숲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가 조림사업을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1956년, 땔감이나 목재로 나무를 베어내기만 하던 시절에 조림을 시작했으니 당시로선 수십 년 앞을 내다본 혜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소규모로 조성된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은 그를 만나 면적과 덩치를 키워 나갔다. 이때부터 20여년 동안 심은 나무가 253만그루, 면적은 여의도의 두 배에 가깝다.
1968~69년 가뭄이 극심했을 때 산등성이로 물을 퍼 올린 일화는 전설처럼 남아 있다. 눈앞의 농작물이 말라 죽는 상황에서 나무를 살리겠다고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그의 모습은 주민들에게 비웃음거리였다. 그러나 몸을 아끼지 않은 집념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웃의 도움으로 죽어가는 나무를 살릴 수 있었다.
빚을 내면서까지 조림사업을 계속하다 1987년 사망한 후 축령산은 한때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벌목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산림청이 숲을 매입해 현재 ‘장성치유의숲’으로 관리하고 있다. 순창 선영에 안치됐던 그의 유골도 평생을 바친 축령산으로 이장했다. 임종국(林種國)이라는 이름처럼 나라(國)를 위해 씨앗(種)을 심고 숲(林)을 가꾼 뜻을 기리는 ‘조림공덕비’도 세워졌다.
추암마을에서 공덕비가 있는 산등성이까지는 약 1.5km, 쉬엄쉬엄 1시간가량 걸린다. 주 등산로는 산 넘어 금곡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다. 차가 다닐 정도로 널찍하고 경사도 완만한 편이다. 추암마을 주차장 오른편에서 연결되는 흙길로 걸으면 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 더 운치 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덜 미끄러워 걷기에도 한결 낫다. 산등성이까지 오르는 동안에도 간간이 편백나무 숲이 이어지지만 절정은 능선에서 금곡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약 1.5km 구간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숲내음숲길, 산소숲길, 건강숲길, 물소리숲길, 맨발숲길, 하늘숲길 등 여러 갈래길이 가지를 치듯 연결돼 있다.
눈 덮인 편백숲은 북국의 타이가 침엽수림 못지않게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원뿔형으로 뻗은 나뭇가지마다 소복하게 눈이 덮여 검푸른 상록수림이 은빛 찬란한 겨울 숲으로 변신했다. 바람 방향에 따라 적갈색 기둥에 눈발이 둘러붙은 모습을 보면 한 순간, 자작나무 숲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따금씩 가지에 쌓인 눈덩이가 떨어진다. 눈가루가 빼곡한 나무 기둥 사이로 요정처럼 흩날린다. 바람이 없으면 햇볕이, 그것도 부족하면 나무 자체의 온기로 겨울의 무게를 조금씩 털어 낸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바람소리마저 흡수해 사방이 적막강산이다. 낯선 세상에 홀로 고립된 듯한데 마음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충만하다. 스트레스 해소와 항균 작용을 돕는다는 피톤치드의 효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기분 좋게 건강해지는 숲이다.
세상살이도 숲처럼 나누는 지혜가…
축령산 편백나무 숲은 조성 당시의 모습에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하는 중이다. 60년 넘은 아름드리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빼곡한 숲길을 걷다 보면 이제 막 가지를 키우는 어린 나무와 한창 성장기에 접어든 청년 나무가 혼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심에 추암마을의 ‘백련동편백농원’이 있다. 축령산 편백숲의 가치를 키워가는 마을기업이다.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김진환(35)씨는 30여년 전 할머니 고향인 이 마을로 귀촌한 할아버지(김규삼ㆍ90), 아버지(김봉석ㆍ63)와 함께 3대가 숲을 가꾸고 알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어엿한 법인 대표지만 명함에 찍힌 그의 직함은 팀장이다. 편백숲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게 주된 일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주춤한 상태지만 산림청과 연계한 숲 체험을 비롯해 비누와 향신료, 편백을 활용한 소품 만들기와 천연염색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부친은 농업법인에서 활동하는 3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편백나무 씨앗을 발아시켜 묘목을 키우는 일에서부터, 편백나무 가공품을 생산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다. 베개와 도마 등 나무를 직접 가공한 제품에서부터 편백나무의 유용한 성분을 첨가한 비누와 치약, 가글과 향신료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활용품은 편백농원 매장에서 판매된다.
편백숲 여행객에게 인기 만점 품목은 농원에서 판매하는 6,000원짜리 ‘백련동 시골밥상’이다. 돼지 수육과 모두부, 생선조림, 제철 나물무침 등 12가지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져 1인분만 시키기에는 미안할 정도다. 대부분 자체 생산하는 농산물을 재료로 쓰기 때문에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만, 수익만 바라고 판매하는 메뉴는 아니다. “6,000원으로 푸짐하게 식사를 하고 나면 손님들 마음이 아주 순해져요.” 아버지 김봉석씨의 말이다. 이렇게 식사를 마친 여행객은 식당 앞에 차려진 가판에서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도 사고, 파전에 막걸리도 한 잔 걸치는 등 주머니 인심이 절로 후해진다. 말하자면 ‘6,000원 밥상’은 일종의 미끼상품이자 편백농원이 주민들과 소통하는 고도의 상술(?)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숲의 지혜를 세상살이에 고스란히 적용한 셈이다.
추암마을 반대편 북일면의 금곡마을 역시 편백숲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축령산을 등진 채 동향으로 자리 잡은 마을로 1950~60년대의 경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천하대장군ㆍ지하여장군 장승 뒤에 ‘금곡영화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반긴다. 임권택 감독이 ‘태백산맥’(1994)을 촬영한 후, 산골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내 마음의 풍금’(1999), 시골 분교로 발령 난 교사의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연출한 ‘만남의 광장’(2007) 등 옛날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다수 촬영한 마을이다. 영화마을로 알려진 후에는 전선을 지중화해 겉모습만은 강원도 산골보다 더 오지 같은 곳이다.
폭설이 내린 지난 7일 금곡마을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얀 눈 속에 묻혔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덮였고,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어느 집 처마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골목에 쌓인 눈을 치우던 한 주민은 3년 만에 눈다운 눈이 내렸다며 겨울다운 날씨를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다. 흩날리는 가루눈이 방금 쓸어낸 바닥을 또 하얗게 덮고 있었다.
금곡마을에서 추암마을까지 숲길은 약 5.8km, 그리 길지 않지만 전 코스를 완주하고 되짚어 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다. 보통은 두 마을에서 산등성이의 ‘산림치유센터’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장성=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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