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부친 3년상을 위해 의병 사령관직을 사퇴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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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를 연결하는 대로(大路) 이름은 왕산로(旺山路)다. 왕산은 허위(許蔿·1855~1908)가 썼던 호(號)다. 대한제국 때 의병장 허위는 1908년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허위는 경상도 선산 사람이다. 이제 서울 종로통에 경상도 사람 호가 붙은 길이 생긴 연유를 알아보자. 제목은 ‘서울진공작전’이고 공동 주연은 의병장 이인영(李麟榮)과 모든 의병들이다.
244. 1908년 서울 진공 작전과 13도 총사령관 이인영의 귀향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정미의병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일본은 7월 19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을 퇴위시키고 8월 1일 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그날 황실 친위부대인 시위대 참령(소령) 박승환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1895년 일어난 을미의병과 1905년 벌어진 을사의병에 이어 정미의병(丁未義兵)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해산당한 제국 군사들은 반납을 거부한 무기를 들고 의병에 가담했다. 근대 화기(火器)를 소지하고 근대 군사훈련을 받은 전사들이 대 일본 전투에 뛰어든 것이다.
그로기 상태에 빠진 대한제국 정부에 독립전쟁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들은 의병(義兵), 스스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들이 되었다. 정규 일본군에게는 절대적 열세였지만, 그래도 이전 의병들과는 화력이 달랐다.
그래서 조선 주둔 일본군인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또한 정예 부대를 투입해 대토벌 작전을 벌여야 했다. 총을 든 의병만 아니라 의병 근거지를 초토화해 뿌리를 뽑는 작전이었다. 촌락 하나쯤 주륙하는 것은 일도 아니어서, 일본군 스스로도 ‘무고한 양민에 대해서 크게 동정해 마지않은 점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조선주차군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1913)’, ‘독립운동사자료집’3, p671~672)
영국 기자 매켄지와 의병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Mckenzie·1869~1931)는 그 치열한 전투를 눈으로 목격했다. 나중에 3·1운동 때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 살인 사건 또한 목격하고 기사를 썼던 이 저널리스트는 일본군과 의병 진영을 오가며 의병 활동상을 기록했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미국이 독립을 지켜주리라 확신하는 고종 최측근 이용익에게 매켄지는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까닭이 있는가.”(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1920, p78) 국가가 해주지 않는 그 독립과 자강(自强)을 이제 보니 의병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양근(현 양평)에서 만난 의병들은 젊거나 어렸고, 의연했다. 그가 기록했다. ‘열여덟 살에서 스물여섯 살 정도. 병사 6명 가운데 5명은 총기 종류가 다 달랐다. 모두 쓸모없는 총이었다. 한 사람은 옛 조선군 화승총과 화승과 화약통을 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화승총이 주력 무기였다. 두 사람은 조선군 라이플을, 한 사람은 미국에서는 할아버지가 열 살짜리 손주에게나 선물할 딱총을 가지고 있었다. 녹슨 중국제 피스톨도 보였다. 이런 무기로 몇 주째 일본군을 상대했다니!’(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E.P. Dutton&Co, 1908, p200~201) 그럼에도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과 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패전했다.
열차를 타고 잇달아 대한제국에 진입한 일본군은 의병 근거지를 초토화했다. ‘눈앞에 잿더미로 변한 이촌(Ichhon) 마을이 나타났다. 파괴는 철저하고 완벽했다. 집은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체도 다 무너져 있었다. 솥은 다 깨져 있었다. 주민들 말로는 뒷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선 일본군이 마을로 내려와 “왜 활개 치는 의병들을 놔뒀냐”며 다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며칠 동안 이런 풍경이 계속돼 감정도 무뎌졌다.’(매켄지, 앞 책, p185~187)
영국 기자와 13도창의군의 만남
매켄지가 양근에서 만난 의병대는 일본과 각국 공사를 향해 포고문을 발표한 연합 부대였다. 포고문은 이러했다. ‘무기가 곤궁해 적군과 싸울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외국 공사들에게 사악한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제안한다.’(매켄지, 앞 책, p174)
이 포고문을 작성한 부대 이름은 ’13도창의군'이다. 조선 팔도에서 거병한 의병들 연합부대다. 총사령관 격인 창의 총대장은 이인영이었고, 총대장 휘하에서 연합 부대를 이끈 야전사령관 군사장이 바로 왕산 허위였다. 을미사변 때 류인석 부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유생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 의병장들 권유로 원주에서 창의했다. 그때 부친 와병을 이유로 창의를 거부했던 이인영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는 마당에 무슨 말인가”라는 반박에 대장 자리를 수락했다.(‘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8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
허위 또한 을미의병을 거병했다가 정계로 돌아간 사내였다. 그러다 정미년에 다시 강원도 등지에서 거병한 뒤 양근에서 연합군을 구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1만 병력 연합군 가운데 허위와 이인영 부대 규모가 가장 컸다.
그런데 포수 신돌석이 이끄는 경상도 부대와 하급 군인 출신 문태수가 지휘한 전라도 부대는 13도 창의군에 불참했다. 초기 편제에는 들어 있었는데 최종 편제에는 제외돼 있다. 학계에서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 탓에 기간 내 양평에 도착할 수 없었다’고 추정한다.(신용하, ‘한국항일독립운동사연구’, 경인문화사, 2006, p16)
정미의병 주력 부대는 해산 군인과 포수 부대였다. 매켄지는 이렇게 기록했다. ‘서울에서 80~90마일 동쪽 지역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거기에는 호랑이 사냥꾼이 많았다. 총은 탄환을 한 번 장전하면 한 번밖에 격발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냥꾼들은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호랑이한테 접근한 뒤 한 방으로 죽였다. 안 그러면 자기가 죽는다.’(매켄지, 앞 책, p170)
서울진공작전과 동대문전투
1908년 1월 28일, 음력으로는 1907년 12월 25일이었다. 이미 포고문을 통해 서울 진격을 예고한 13도창의군은 양근에서 서울로 진격했다. ‘서울진공작전’이라 불리는 이 작전 목표는 무력을 통한 수도 회복과 각국 공사관에 대한 국권 회복 호소였다.
1만 대군이 행군하는 모습은, 긴 뱀이 기어가는 장사진(長蛇陣) 그대로였다.(1909년 7월 30일 ’대한매일신보') 위풍당당했지만, 전술적으로는 적에게 모든 것을 노출한 패착이었다. 진영 간 소통이 되지 않아, 합류하기로 했던 다른 부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피곤이 누적되고 탄약도 떨어진 상태에서, 창의군은 동대문 30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창의군 병력은 1만 명이 넘었고, 진영이 갖춰지면 참으로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대한제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최후의, 최대의 무장투쟁은, 하지만 패배로 끝났다. 그때까지 도합 38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했던 노련한 부대였지만, 중과부적이었고 예상된 패배였다. 퇴각한 연합군이 한숨을 돌리는데,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대장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중책을 허위에게 맡기고, 나는 귀향하노라.”
총사령관 이인영의 귀향
1908년 1월 28일 고향 문경에서 아버지 부고(訃告)가 연합군 진영으로 날아온 것이다. 이에 이인영은 ‘남쪽을 향해 곡을 하고 장졸들에게 귀향하여 상을 마치겠다고 공포한 뒤 군 전체의 승인을 받지 않고 뒷날을 군사장 허위에게 부탁하고 떠났다.’(1909년 7월 31일 ‘대한매일신보’)
후임 총대장 허위는 이후 흩어진 의병들을 규합해 1908년 4월 2차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체포돼 1908년 9월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 심문 당시 배후를 묻는 일본 관리에게 허위는 이렇게 말했다. “이등박문이 의병 배후고 대장은 나다.”
3년상을 위해 진영을 떠났던 이인영은 1909년 6월 충북 황간에 은신하다 체포됐다. 심문을 맡은 한국주차헌병대 대위 무라이 인켄(村井因憲)이 이인영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버지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거듭된 질문에 이인영이 답했다.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다.”(‘통감부문서’8, 1909년 6월 30일 일본군 헌병대본부 이인영 1, 2차 조서) 이인영 또한 선비 기개를 보이며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 허위도 이인영도 선비요 사대부였다. 바야흐로 옛 세계관과 새 세계관이 복잡하고 난해하게 뒤섞여 있던 시대였다. 두 사람은 각각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허위, 1등급)과 대통령장(이인영, 2등급)을 받았다. 서울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허위가 끝내 진군하지 못한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양근에서 만난 어린 의병들은 매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죽겠지. 하지만 일본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게 낫지.” 그랬다.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희생되는 시대에, 그 공동체의 많은 무리는 자유를 택하고 공동체를 택했다. 그 엄혹한 시대가 100년이 갓 넘은 20세기 초에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 미래에 산다.
<통감부문서 8권 1909년 6월 30일 일본군 헌병대본부 이인영 1,2차 조서>
헌병대위 무라이 인켄: 왜 아버지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유자(儒者)로서 동양 도덕과 당신 행위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병장 이인영: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는 재회할 수 없지만 임금은 다시 만날 수 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다. 불충에 해당한다.
헌병대위 무라이: 3년 상중에 한국이 멸망에 이르렀다면 어떠하였겠는가?
의병장 이인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국기자 매켄지가 본 의병: (양근에서 만난 의병들은) 불쌍한 집단이었다. 사내들은 이미 절대 희망 없는 명분으로 전투를 벌이며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빛을 번뜩이며 미소 짓는 병사를 보고 내 마음이 바뀌었다. 가련하다고? 아니었다. 최소한 그 미소와 눈빛은 애국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일본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게 낫지.” (F. 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p201)
*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 독립운동을 세계에 보도한 프레더릭 매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4등급)을 추서했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작전: 1907년 9월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고시(告示)를 발하여 완고하게 깨닫지 못하고 비도에 투신하거나 또는 그것을 은피시키고 혹은 흉기를 숨기는 자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할 뿐 아니라, 촌읍은 주륙(誅戮)을 가했다. 무고한 양민에 대하여서는 크게 동정해 마지않는 점이 있었다.(‘독립운동사자료집’3, ‘조선주차군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 p67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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