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쇄국' 펼치던 일본은 어떻게 서양 국가들과 교류했을까?
日, 임진왜란 후 쇄국정책 실시.. 네덜란드인 통해 서양의학 등 소개
나가사키엔 日 젊은이들 유학 물결.. 17∼19세기 서양 지식체계 전해져
○ 일본과 포르투갈 무역
신대륙 발견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은 직접 배를 타고 와 아시아 국가와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국가 중 포르투갈은 1550년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히라도(平戶)항에 도착해 일본과의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온 이유는 무역 확대와 기독교 포교였습니다. 이 시기 포르투갈은 일본에 철포(鐵砲·조총)를 전해 주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나가사키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 내 기독교인의 수가 6만 명에 이르고 70여 개의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江戶)막부를 설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정권 안정을 위해 기독교 포교 금지와 쇄국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지방 정부인 번(藩)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습니다.
에도막부는 서양과의 무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상인 25인에게 자금을 출자해 인공 섬인 데지마(出島)를 건설하게 한 후, 여러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인을 이곳으로 이주해 살게 했습니다. 포르투갈인의 기독교 포교를 금지하고 무역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요.
○ 일본과 네덜란드 무역
에도막부의 기독교 포교 금지는 포르투갈인과 나가사키 지역 기독교인의 많은 반발을 샀고, 반란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막부와 포르투갈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고, 막부는 1639년 포르투갈 배가 일본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데지마는 무인도가 되었고, 나가사키항의 해외 무역량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에도막부는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무역상사)을 데지마로 이전하게 했습니다. 네덜란드 상관은 무역에만 종사하였고 기독교 포교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에도막부는 네덜란드 상관과만 무역하였고, 다른 서양 국가의 배들은 일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에는 대략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인원이 거주하였습니다. 상관장과 부상관장, 창고장, 상무원, 서기, 보조원, 의사 등이 거주하였고, 이들은 원칙적으로 데지마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에도막부는 나가사키 봉행(奉行)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네덜란드 상관을 통제하였습니다.
보통 상관장은 일행을 이끌고 1년에 한 번 에도에 도착해 쇼군을 만나 감사를 표시하고 선물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행사를 ‘에도 참부’라고 불렀으며 1850년까지 116회에 걸쳐 시행되었습니다. 행사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네덜란드가 부담했습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이 정기적으로 왕래하였습니다. 데지마의 주요 수입품은 설탕, 직물, 향신료, 장식품 등이었고, 수출품은 은, 구리, 도자기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 에도막부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서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였고, 무역의 양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 난학(蘭學)의 시작과 발전
난학은 네덜란드 및 유럽의 지식체계가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성립한 학문입니다. 에도막부 시기 난학의 보급과 발전은 보통 3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네덜란드어 통역관들에 의해 어학이 보급되고 난학서가 번역된 시기입니다. 에도막부는 나가사키 봉행 소속으로 통역사를 고용하고 급료를 지급했습니다. 통역사는 모든 행사에 네덜란드인과 동행하였으며, 점차 난학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을 통해 서양의 의학, 수학, 천문학, 군사학 등의 최신 과학 지식을 소개하는 서적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통역사는 서양 학문을 습득해 일본인에게 가르치고 중요 서적을 번역했습니다. 점차 일본 젊은이는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나가사키로 유학을 왔으며, 이들은 초기에 어학을 배우고 점차 자신의 관심 분야로 연구를 확대하면서 난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했습니다.
둘째 단계는 서양의 의술과 과학기술이 보급된 시기입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의사가 거주하며 네덜란드인을 치료했고, 어떤 경우에는 일본인 앞에서 직접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 줬습니다. 점차 일본인은 서양 의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난학자인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는 해부학 서적인 ‘해체신서’를 번역 보급하였습니다.
1823년에는 젊고 유능한 독일 출신 의사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데지마를 방문하였습니다. 지볼트는 나가사키 근교에 나루타키(鳴瀧) 학원을 세워 의학과 과학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일본 전체 난학자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셋째 단계에서 난학자들은 군사 분야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막부 말기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특히 러시아의 일본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지식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개항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식 포술을 배워 위기에 대처하려 했습니다. 특히 막부는 1855∼1859년 네덜란드 해군 교관을 초빙해 서양식 해군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이 시기가 난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보다 영국의 문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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