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진 인권 감수성으로 새로운 문제 다룬다

정희상 기자 입력 2021. 1. 13. 01:53 수정 2021. 3. 2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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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화위)' 2기 위원장으로 임명된 정근식 교수는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만큼 새로 포착된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2기 진화위는 조사권한도 강화됐다.
ⓒ시사IN 신선영정근식 위원장은 “과거사 문제의 경우 국가 공권력의 오남용 사건인 만큼 위원회와 피해자가 공동으로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 권위주의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험난한 현대사에서 공권력의 오남용으로 인한 크고 작은 피해를 비켜간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집단학살, 감금 노동, 납치, 고문, 성폭력 등 직접적이고 가혹한 인권유린을 당한 뒤 가해자인 국가 공권력의 은폐·왜곡으로 심신이 파괴된 채 피멍 든 가슴을 쓰다듬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줄기차게 국가를 상대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해왔다. 유족들은 국회 앞에서 수백 일에 걸친 천막 농성과 단식을 벌였다. 더러는 소복을 입고, 더러는 상여를 메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행한 과거사를 청산할 입법 제정을 촉구했다. 그들의 간절한 호소는 2005년에 이르러 국회의 화답을 받았다. 그해 6월, 여야 합의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정리법)’이 제정된 것이다. “항일 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해서”라는 임무를 수행할 독립적인 국가 조사기관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화위)’가 출범했다.

1기 진화위는 2006년 1년간 피해 국민들로부터 모두 1만1172건을 신청받아 4년여 동안 피해 조사를 벌였다. 민족독립 분야, 한국전쟁 전후의 집단희생 분야, 인권침해 분야로 나눠 현장조사와 자료 발굴, 참고인 진술조사 등을 벌였다. 그중 진상이 규명된 사건은 8450건이었다. 당시 진상이 규명된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만 9698명에 달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진화위 활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대거 진화위 위원 자리를 차지했다. 진실 규명은커녕 사건의 진실이 왜곡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국적으로 해당 피해자 중 고작 5%만 진상규명을 신청한 상황에서 2010년 말 진화위는 활동기한 만료를 이유로 서둘러 해산했다. 피해자들은 1기 진화위 해산에 굴하지 않고 2011년부터 2기 진화위 구성을 요구하는 기나긴 싸움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선감학원 사건 등 군사 독재정권 당시 수용시설에서 자행된 광범위한 집단 인권유린 사건 피해자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과거사 피해 구제’ 관련 법률의 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927일 동안 천막 농성을 벌였다. 제20대 국회가 끝나도록 정치권에서 메아리가 없자 이들은 2020년 5월 의원회관 고공농성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에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국 국회에서 2020년 6월 여야 합의로 ‘과거사정리법’이 개정되며 진화위가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2기 진화위의 활동 범위는 1기 때보다 대상이 약간 넓어졌다. “항일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 동포사, 광복 이후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및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

이 법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은 2기 진화위원장으로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를 임명했다. 정 교수는 1980년대 후반 광주·전남 지역의 은폐된 현대사 사건 조사를 시작으로 과거사 문제 연구에 발을 디뎠다.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을 지낸 그는 제1기 진화위 기간에는 ‘제노사이드(대량학살) 연구회’를 조직해 전국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을 연구했다.

2020년 12월10일, 2기 진화위가 공식 출범했다. 이날 정근식 위원장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제1호 사건으로 신청받았다. 그를 서울 퇴계로에 자리한 진화위원장실에서 만났다.

ⓒ시사IN 신선영2019년 11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제2기 진화위의 1호 신청이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2기 진화위는 1기보다 좀 더 정치적 합의 기반이 넓다. 그 배경엔, 1기 당시 미처 인권침해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억눌렸던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사건 등 1970년대 집단 수용시설 피해자들의 호소가 있었다. 1기와 2기에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그 사이의 10년 동안 ‘미투’ 등을 계기로 인권 감수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기 당시에 민간인 학살 같은 이념적 갈등의 유산을 정리했다면, 2기에선 확실히 높아진 인권 감수성에 기초해 새로 포착된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 합의 기반이 넓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2기 진화위는 아시다시피 제20대 국회 막판에 (국민의힘 계열 정치인인) 김무성 의원이 힘을 보태서 1기 때보다 더 진전된 여야 합의(보수·진보 합의)로 과거사정리법을 개정하면서 출범했다. 형제복지원이 자리했던 부산 중심의 보수정당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필요성을 인정하고 합의한 덕분이다. 그 배경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피눈물 나는 진상규명 투쟁이 있었다.

출범 이후 2020년 연말까지도 야당은 위원 선임을 하지 않고 있는데.

2기 진화위가 정상 출범을 못해서 유감스럽다. ‘당장 다른 정치적 현안이 급하다’는 야당 입장을 이해하며 기다리고 있다. 최근 국민의힘 측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위원들을 추천할 의향이 있다는 언질을 했다고 보고받았다.

2기 진화위 관련 법이 1기 당시와 다른 점은?

조사 권한과 신고 범위, 신청 기한 등이 더 늘어나고 조사 권한도 강화됐다. 준사법기구는 아니어도 준준사법기구는 된다. 비공개 청문회도 개최할 수 있고, 조사 방해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좀 더 강화됐다.

피해 유족 측 요구를 들어보았나?

가장 큰 불만이 증거에 대한 입증책임 문제였다. 1기 진상규명 과정에서는 피해자 측이 증거를 다 제출토록 했는데, 2기에서는 위원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해서 피해자 측에 제공해달라고 하더라. 국가 공권력의 오남용으로 저질러진 사건인 만큼 위원회와 피해자가 공동으로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 최대한 자료를 발굴해서 유족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피해자들이 발굴한 민간인 집단학살 피해 유골이 전국에 방치되고 있는데.

유해 발굴 문제는 진상규명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다. 2기 위원회 활동 기한 내에 최대한 종합계획을 짜서 유골을 수습할 것이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골은, 진화위 법률에 따라 설치될 과거사재단에서 이어받아야 하리라 본다.

ⓒ정택용 제공2020년 12월10일 정근식 위원장이 진화위 출범식을 마치고 모란공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법에 피해자 배·보상 문제가 빠졌다.

배·보상 규정은 여야 간 합의가 되지 않아 법률에서 빠졌다. 그대로 두면 진상규명 후에 피해자들이 다시 법정을 다니며 고통받게 된다. 진화위 내부적으로는 배·보상 규정을 넣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고 본다. 2기 위원회는 진상규명을 해나가며 피해자들과 협의하고자 한다. 필요하다면 배·보상 규정을 넣어 개정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 주요 사건 중 여순 사건의 진상규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순 사건의 경우는 제주 4·3 사건을 참조할 수 있다. 4·3 사건은 이미 20년 전에 특별법이 만들어져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여순 사건 피해자들은 ‘왜 우리만 왜 제외되느냐’라고 호소한다. 내가 파악해본 바로는, 여순 사건의 직접적인 민간인 피해자들이 400~1000명 정도다. 2021년 초에 여순 사건 피해 유족들을 모신 특별 간담회를 열고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

1987년 대선 직전의 KAL 858기 폭파 사건에 대해서도 유족의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2020년에 대구 MBC가 KAL 858기 추정 동체를 발견했다. 파악해보니 외교부에서도 동체 인양을 위해 20억원 규모의 예산을 준비한다고 하더라. 그 동체가 확실히 당시 KAL 858기의 잔해라는 증거가 나오거나 유족들의 신청이 들어오면 검토해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하려고 한다.

선거 결과 등 정치 풍향에 따라서 진화위가 또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2기 진화위 출범의 경우, 생각보다는 정치적 논란이 적었다. 여야 합의 아래 출범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1기 때보다 정치적으로 외풍을 덜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바람직한 과거사 정리를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근 한류나 K팝, K방역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한국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가장 선진적인 인권 국가라는 점이라고 본다. 한국만큼 현대사가 굴곡지고 역동적인 나라가 없다. 성취가 큰 만큼 그림자도 컸다. 성취뿐 아니라 그림자를 지우는 부문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나라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국가 공권력 오남용의 피해자들에 대해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 사람들의 삶이 다시는 불행하게 반복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 “우리가 이걸 해냈어”라는 뿌듯함과 자부심을 갖게 되면 좋겠다. 화해의 핵심 포인트는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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