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라는 고딕 스릴러

박서련 2021. 1. 1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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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문예지 〈악스트〉에서 기획 연재물로 '여성 서사-고딕 스릴러'를 선보인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감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음을 고백해야겠다.

즉 여성 서사라는 대분류 안에 있는 작품들 전반에 불안과 고통이 이미 드리워 있는데, 거기에 고딕 스릴러라는 구체적 장르를 더하는 것은 단순한 동어반복이 되지 않는가.

고딕 스릴러라는 장르에 K-여성 서사보다 '잘 붙는' 다른 대분류를 상상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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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문예지 〈악스트〉에서 기획 연재물로 ‘여성 서사-고딕 스릴러’를 선보인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감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음을 고백해야겠다. 후일 이 기획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제목이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인 것을 알고 역시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여성 서사가 스릴러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즉 여성 서사라는 대분류 안에 있는 작품들 전반에 불안과 고통이 이미 드리워 있는데, 거기에 고딕 스릴러라는 구체적 장르를 더하는 것은 단순한 동어반복이 되지 않는가. 이것이 나의 의구심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읽기로 한 것은 이 테마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들 다수에게 품고 있던 강한 신뢰 때문이었다.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내 의구심이 틀렸음을, 아니 그보다는, 내 편견을 고쳐 써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게 되었다. 고딕 스릴러라는 장르에 K-여성 서사보다 ‘잘 붙는’ 다른 대분류를 상상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고딕 스릴러는 공간의 역할이 인물보다 중요한, 거의 유일한 장르다. 소설에도 엔딩크레디트나 스태프 롤을 쓴다면 주인공 명단에 집의 이름도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되어 역사가 생긴 지붕 아래에는 단수의 인간이 차마 헤아릴 수 없도록 어두운 정념이 쌓이고 이 정념은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오래된 건물은 대를 이어 전해져온 전근대성을 말한다.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그 자체가 된다. 이 서사적 특징의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온다면, 주인공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여성이라야 한다. 오래된 집이 사람을 지켜주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묶어 가둔 우리인 것을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공기 중에 은은히 떠다니는 선대와 후대 사이, 현지인과 이방인 사이 미묘한 긴장과 반목을 여자들은 체로 떠내듯 건져낼 수 있다. 긴 세월 축적된 정념이 운명을 가장하여 발목을 잡으려 할 때 비명을 지르는 것 또한 여성 화자의 몫이다. 어쩌면 모든 K-여성이 고딕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책을 여는 독자는 어느덧 이야기와 일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험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은 싸움을 위한 지침서도 아니고 운명이라 이름 지어진 전근대성의 희생자 사례집도 아니다. 최소한의 장르적 약속을 남겨둔 채 각 작품이 뻗어가는 상상력은 놀랍도록 분방하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사라지는 건 언제나 여자들뿐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사라진다는 말에는 ‘여기에서 거기로 간다’는 뜻도 있다. 보이지 않게 된 여자들은 단지, ‘여기’에 없을 뿐이기를 바란다. 여기에 있어야 할 운명을 거슬러 이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저항하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박서련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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