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만개, 무엇을 말해주나

이규화 2021. 1. 1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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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문화평론가

부캐 열풍은 2020년의 대표적인 유행 중 하나였다. MBC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부캐릭터를 줄인 '부캐'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유재석은 여기에서 드러머 유고스타, 트로트 신인가수 유산슬, 라면 요리사 라섹, 하프 연주자 유르페우스, 닭 튀기는 닥터유 등의 캐릭터로 활약했다. 이것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자 개그우먼 김신영은 둘째 이모 김다비라는 부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추대엽은 카피추를 내세웠다. 스타들의 부캐로 이뤄진 싹쓰리, 환불원정대라는 그룹도 생겼다.

원래의 그 사람을 본래 캐릭터를 줄여 본캐라고 표현하는데, 본캐를 완전히 숨긴 상태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전혀 다른 사람 행세를 할 때 부캐라고 한다. 누가 봐도 유재석인 줄 아는데 유재석이란 사람을 모른다며 유산슬 행세를 하는 식이다. 이것이 막장드라마에서 점찍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눈속임이라서 B급 유희로 받아들여졌다. 펭수가 남극에서 온 펭귄이라고 우기는 것에 환호하는 B급 유희의 시대이기 때문에 부캐도 각광받은 것이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이미 사람들이 가상의 캐릭터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아이디, 닉네임, 대화명, 아바타 등이 바로 실체를 대표하는 가상의 캐릭터들이었다. 그런 인터넷 문화가 고도화되면서 부캐 신드롬이 나타날 조건이 형성됐다. 사회적으론 단일한 정체성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시점이었다. 과거엔 부모, 직장인 등 전형적 정체성이 각각의 개성을 압도했다. 집단 속에서 각 개인이 맡은 역할이 중요했던 시기다.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이지 그 외의 다른 정체성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단 입사하면 평생직장이어서 맡은 역할이 곧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사적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평생 동안 남들과 비슷하게 살았다.

그런 구조가 2000년대 들어 깨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개인'에 눈 뜨게 된 것이다. 주어진 사회적 역할 이전에 나의 취향, 나의 행복을 찾게 됐다. 부모이기 전에 사람이고, 직장인이기 전에 '나'인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취향이 중요해졌고 점잖은 중년 사회인이 아이돌 '덕질'에 몰두하는 등 다층적인 삶을 살게 됐다. 부모도 아니고 과장님도 아닌, 예컨대 '별사랑'님이 되어 나만의 행복을 찾게 된 것이다.

소확행 열풍과 함께 저마다의 행복을 찾으려는 욕구가 더 강해졌다.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염원하던 행복한 삶의 모델이 있었는데 양극화와 집값폭등, 노동유연화 등으로 그것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집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는 대신 당장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자는 흐름이 나타났는데 바로 그것이 소확행이다. 그러다보니 과거처럼 현재의 생업에 자신의 100%를 내던져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퇴근 후의 또 다른 삶을 중시하게 됐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성장과 경제불황이 모두 부캐 열풍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배고픈 시절엔 개인의 정체성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경제가 성장하니까 개인의 취향이 대두됐다. 둘째, 경제가 활황 고도성장세를 이어갈 땐 모든 사람들이 상승의 꿈을 꾸며 앞만 보고 달려갔었는데, 상승의 희망이 깨지자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취미활동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양한 정체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단순히 취향, 행복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더 직접적으로 수익과 연결된 일이기도 하다. 양극화 구조에서 충분한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부업을 찾게 되고 그것이 또 다양한 정체성으로 이어진다.IT 기술 발달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인터넷 카페나 게임, SNS, 유튜브 활동 등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할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그런 활동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취향이나 장점 등을 알게 되고 그 방향으로 전문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됐다.

바탕에 가벼움이 깔려있다는 것이 부캐 열풍의 또 다른 특징이다. 진지한 자아탐구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가벼운 놀이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내세운다. 마치 게임할 때 자신의 아바타를 가볍게 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거운 삶의 태도를 '극혐'하는 세태와 연결된다. 이러한 변화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 사람 속에서 다양한 가능성이 만개하는 부캐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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