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버리면 보이는 것들

이봉현 2021. 1. 1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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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책무실]

16개월 영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양부모의 첫 재판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1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 울타리에 파란색 바람개비가 달려 있다. 파란색 바람개비는 아동학대로 떠난 아이들이 하늘에 소풍 간 것이란 의미를 담아 한 시민이 만들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태어난 지 16개월 만에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정인이 소식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했다. 지난해 10월 크게 보도된 사건을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끌어낸 것은 2일 방송된 <에스비에스>(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이하 ‘그알’) 였다. 경찰청장이 사과하고 총리와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했으며, 국회는 민법 개정안 등 관련 법안을 일사천리로 의결했다. 그 일주일 동안 왜 신문과 방송 뉴스가 아니라 ‘그알’ 같은 시사프로그램이 기폭제 역할을 했을까 궁금했다. 기자들이 ‘역삼각형’ 관점에 사로잡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상일을 알리는 언론인은 크게 두 개의 연장을 갖고 있다. ‘역삼각형’과 ‘내러티브’라는 기사 작성법이다. 육하원칙을 골격으로 한 역삼각형은 비싼 전보로 기사를 보내던 시절 서구의 통신사가 개발했고, 지면 제약이 있던 신문사에서 꽃을 피웠다.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근거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뒤에 붙인다. 정보를 압축해 일목요연하게 전하는 장점이 있지만 사안을 심층적, 다면적으로 보여주기 어렵고 재미와 감동이 떨어진다. 반면 내러티브는 이야기체로 기사를 쓰는 것이다. 사실 소설, 연극, 영화 등 모든 콘텐츠는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이다. 내러티브에는 사람이 있고, 인생 희로애락이 그려진다. 효율보다 공감이 우선이다. 유연하지만 더 많이 취재해야 가능한 글쓰기이다. 두 연장은 쓰임새가 달라 상황에 맞게 골라서, 또는 섞어서 써야 한다.

역삼각형 관점은 속성상 새롭고 놀라운 일을 찾는다. 한번 나온 정보, 다른 매체가 다룬 사안은 뉴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의미를 추구하는 내러티브는 ‘앵글’이 다르면 새로운 뉴스라고 본다. ‘그알’도 이미 많이 보도된 정인이 사건을 다루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담당인 이동원 피디는 SBS 라디오에 출연해, 시험 삼아 하루 취재를 해본 결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엄청나게 있는 거예요”라고 마음을 바꾼 이유를 밝혔다.

방송 내용으로 미루어 그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어느 독자나 느낀 갈증일 것이다. 즉 △입양 전 아이 모습이 어땠을까? △7개월을 맡아 키우다 “좋은 곳으로 잘 간다”며 안도했던 위탁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정인이를 부모 몰래 소아청소년과에 데려간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떻게 학대하면 그렇게 죽을 수 있나? △불과 한달 만에 학대할 거면 왜 입양을 했을까? △경찰은 왜 아이를 못구했고, 검찰은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았나? 같은 질문이었다. 이야말로 내러티브로 다루면 빛이 날 소재이다.

그렇다고 신문·방송 뉴스가 정인이를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양모의 구속, 송치, 기소 등 계기마다 기사가 나왔다. <한겨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15년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억, 아동학대’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아동학대를 이슈화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발생 사실 위주였다. 역삼각형으로 쓰인 후속 기사에 정보는 있었을지언정 감동은 적었다. 반면 ‘그알’의 내러티브는 실태를 보여줬다. 박재영 교수(고려대)는 저서 <뉴스 스토리>에서 “공분을 유발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실태”라며 “실태를 잘 파악하면, 원인을 짐작할 수 있으며 대안도 떠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기자의 전문성은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몰입과 공감을 찾는 내러티브는 독자와의 소통에 더 민감하다. 정인이 사건을 끌고 온 힘은 세상 어머니들의 관심과 노력이었다. 육아카페가 내내 들끓었고, 청와대 게시판에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성탄절에도 서울 남부지검 앞에서 “양부모를 살인죄로 기소하라”는 릴레이 시위가 계속됐다. ‘그알’은 제보 메일의 홍수가 보여주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에 응답한 것이다.

역삼각형의 원조인 미국은 정작 우리만큼 천편일률적으로 기사를 쓰지는 않는다. 디지털에서는 형식이나 분량의 제한이 덜한데도 기사의 틀은 달라지지 않는다. 역삼각형의 맹점은 필요한 정보 전달에 그치고, 사건의 속살이나 인물의 내면을 취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시사 피디들은 이 빈틈을 파고들어, 기자가 멈춘 곳에서 시작한다. 감동하지 않은 독자가 유료화의 지갑을 열리가 없다.

끌 하나만 가진 목수에게는 온통 깎아낼 나무토막만 보인다. 역삼각형은 필요하다. 버려야 할 것은 세상만사를 그 틀로만 보려 하는 ‘역삼각형 관성’이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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