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결렬' 후 태도 바꾼 북, 한국의 약점을 드러내다

길윤형 2021. 1. 1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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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14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6월28일 오전 일본 오사카 국제컨벤션센터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8초 정도 어색하게 악수한 뒤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이 만남 뒤 일본은 한국에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3개 물질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경제 보복을 쏟아내게 된다. 오사카/연합뉴스
하노이 결렬 이후 북한이 내놓은 새 대외 노선은 한국 외교력의 ‘급격한 위축’이란 연쇄 효과를 불러왔다. 미·일은 이 미묘한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일본은 그동안 북-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 ‘좋든 싫든’ 한국에 도움을 청해왔지만 이제 한국을 건너뛰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도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석양이 진 뒤에야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부질없는 사후 객담이지만, 2019년 2월 말 ‘하노이 결렬’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전방위적으로 꼬여가고 있었다.

북한은 5월4일 원산 호도반도에서 ‘신형 전술유도무기’로 보이는 단거리 발사체를, 닷새 뒤인 9일 서해 구성에서 다시 두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2017년 11월29일 화성 15형을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능력을 확보했음을 실증한 지 무려 1년5개월 만에 무력 도발에 나선 것이다.

하노이 결렬을 ‘다음 대화를 위한 일시적 어려움’으로 받아들인 한·미와 달리 ‘고립된’ 북한의 전략적 평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노이 회담이 끝난 뒤, 북이 자신들의 실망감을 공개 표명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리용호 외무상은 3월1일(현지시각) 0시15분께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로 기자들을 불러 모아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북-미 간에)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지 말하기 힘들다”는 장탄식을 남겼다. 보름 뒤인 15일엔 최선희 북 외무성 부상이 <에이피>(AP) 통신, <타스> 통신 등을 불러 모아 “미국의 강도 같은 입장이 결국 상황을 위험에 빠뜨렸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호의적으로 봐왔던 남의 역할에 대해서도 “미국의 동맹인 남한은 중재자가 아닌 플레이어”라며 냉담하게 평가했다.

북이 하노이 이후 수정된 대외 전략을 공개한 것은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를 통해서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회의 이틀째인 12일 시정연설에서 하노이에서 미국이 보인 태도를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야망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이라 평가하며,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에 배치되는 요구를 그 무슨 제재해제의 조건으로 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와 미국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 있으며 적대세력의 제재 또한 계속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제3차 조-미 수뇌회담을 해볼 용의가 있다”며 묘한 여지를 뒀지만, 대화 전망은 크게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새 노선은 남북 관계에 두 가지 충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첫째, 북이 미국의 제재를 ‘상수’로 생각하겠다고 밝혔으니, 영변 핵시설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핵심 제재를 맞바꾼다는 하노이 회담의 ‘교환 공식’은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은 석달 전인 1월 신년사에서 “온겨레가 북남관계 개선의 덕을 볼 수 있게 하자”며 “아무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혔었다. 하지만 이제 ‘자력갱생’을 새 노선으로 들고나온 이상 남북 경제협력의 필요성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둘째, 북이 ‘제재해제’ 대신 ‘적대시 정책 철회’를 새롭게 요구하고 나섰으니 한국의 신형 무기 도입과 한-미 연합군사훈련 등의 움직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북은 4월 중순부터 F-35 도입(4월13일), 한-미 연합공중훈련(4월25일), 한-미 연합군사훈련(4월27일) 등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가다 8월에 이르면, “정경두(국방장관) 같은 웃기는 것”이라는 막말을 내뱉기에 이른다.

이 두 변화는 한국 외교력의 ‘급격한 위축’이란 연쇄 효과를 불러왔다. 미·일은 이 미묘한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미국이 4월11일 한-미 정상회담과 5월7일 전화회담 등을 통해 “하노이 이후 남북 간에 어떤 실질적인 만남”도 없었고, “문재인과 김정은의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고 밝혔다. 일본의 반응은 좀더 극적이었다. 일본은 그동안 북-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 ‘좋든 싫든’ 한국에 도움을 청해왔다. 그러나 5월6일 도널드 트럼프와 전화회담을 마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북한에 대한 대응에 관해선 모든 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중략) 나 자신이 조건을 걸지 않고 김 위원장과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과의 관계 구축에서 한국을 건너뛰고 김정은 위원장과 ‘기묘한 브로맨스’를 과시하는 트럼프의 도움을 얻겠다는 방향 전환이었다. 이어, 아베는 27일 도쿄를 국빈방문한 트럼프와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인 사키에 등 가족회 관계자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2019년 12월 보고서 ‘2019년 한일관계 평가와 2020년 전망’에서 아베의 ‘조건 없는 대화’ 언급에 대해 “전통적인 ‘투 코리아’(남북을 이간질하며 이익을 취함) 정책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것이라 평했는데, 이는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함께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도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5월20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이 문제를 ‘외교 협의’로 풀겠다는 기존 방침을 포기하고 한-일 청구권 협정 3조 2항에 규정된 ‘중재’(3인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에 판단을 맡기는 것) 절차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외교 협의가 말로 원만히 문제를 풀자는 것이라면, 중재는 ‘법대로 하자’는 경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튿날 오전 10시30분 시작된 고노 다로 외무상의 기자회견은 문 대통령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호전적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월9일 한국에 대해 청구권 협정에 기초한 협의를 요청했다. (중략) 이후 4개월 이상 기다려왔다. 우리 쪽에서도 이 이상 기다릴 순 없기에 중재 요청 통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한국에서도 일-한 관계를 이 이상 악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대표로서 분명한 책임을 갖고 대응해줬으면 한다.” 오는 말이 험악하니 가는 말이 고울 수 없었다. 험악한 말의 응수는 이틀 뒤인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으로 이어졌다. 80분 동안 이어진 이날 회담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하게 맞섰다.

문재인 대통령의 관심은 여전히 6월28~29일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방한하는 트럼프의 일정에 맞춰 현재 ‘교착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외교 이벤트’를 만드는 데 맞춰져 있었다. 문 대통령은 가능한 모든 발언 기회를 활용해 4차 남북 정상회담과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군불을 때기 위해 노력했다. 볼턴의 언급대로 이 무렵 남북 사이엔 의미 있는 소통이 없었지만,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의 저서 <분노>에 따르면 트럼프와 김정은은 3차 회담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담은 친서를 주고받고 있었다. 트럼프의 방한을 앞둔 6월26일 문 대통령이 세계 6대 뉴스통신사 서면 인터뷰에서 “북-미 간에 3차 정상회담에 대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권정근 북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은 27일 담화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사이에도 다양한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쏘아붙였다.

당시 정부가 한-일 현안 해결의 기한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오사카 G20 정상회의였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판결 문제 우리 정부 입장’이라는 한장짜리 보도자료를 내놓은 것은 일본이 요구한 중재위 설치 기한을 하루 넘긴 6월19일이었다. 외교부는 이 자료에서 “소송 당사자인 일본 기업을 포함한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하여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발표를 들은 일본은 경악했다.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전제로 하고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일본 정부가 줄곧 반대해온 안을 한국이 일방 공개했기 때문이다. 불과 이틀 전인 17일 아키바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극비리에 도쿄를 방문한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이 가져온 이 안을 그 자리에서 거부했었다. 아베는 한국의 움직임을 G20 정상회의 때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한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려는 ‘꼼수’라 받아들였다. 이를 입증하듯 문 대통령은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최근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일본에 전달했다. G20의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지는 일본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안을 받아들여 정상회담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태도였다. 결국, 아베가 28일 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한-일 정상은 8초 정도 어색한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30일 판문점에서 사상 첫 남-북-미 정상의 깜짝 회담이 성사됐다. 이 만남은 여러 감동적 장면을 만들어냈지만, 대화 진전을 위한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극히 불투명했다. 7월1일 <아사히신문>은 “판문점 회담의 성과는 북한이 꺼려왔던 실무 협의의 재개”라고 꼬집었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양 정상이 무릎을 맞대고 얘기를 해도 실무자 협의 재개밖에 결정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진전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평했다.

이 감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외교 이벤트가 끝난 다음날, 일본은 마침내 한국의 옆구리에 예리한 칼날을 쑤셔 넣기로 결심한다. ※ 15회에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장.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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