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길을 찾아서-이야기와 함께 걷는 겨울 둘레길
엊그제 동네 뒷산 어귀를 지나다 조금 놀랐다. 입구 주차장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자동차들. 해발 300여 미터에 불과한 이 산이 그나마 시민들의 외출 갈증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걱정도 됐다. 낮아도 겨울 산은 겨울 산이다. 삐끗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한겨울에도 어디든 햇살을 만나고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는 여행꾼들을 위한 소소한 이야기가 있는 가벼운 둘레길로 안내한다.
▶춘천시 봄내길1코스 실레이야기길
김유정의 작품인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등에 들병이들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은 소설 『두포전』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포전』에는 장수골에 살던 가난한 부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부는 겨드랑이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축복은커녕, 날개가 불안을 만든다며 그만 잘라버리고 말았다. 아기는 시름시름 앓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 이야기는 김유정의 기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데, 아기장수 전설길 구간을 걸으며 내내 작품과 요절 작가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달래게 된다.
소설 『동백꽃』과 『유정』의 배경인 잣나무숲을 현실에 되살려놓은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점순이가 소설 속 주인공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산골나그네』에서 덕돌이가 장가 가며 신바람 날리던 길, 『가을』에서 소장수 황거풍에게 아내를 팔아먹은 복만이가 냅다 달아나던 고갯길, 『소낙비』에 등장한 춘호의 처가 맨발로 눈물을 흘리며 더덕을 캐던 위험천만 비탈길 등등 그야말로 실레이야기길은 넘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좀 수다스러운 길이다.
이렇게 김유정문학촌을 출발한 실레이야기길은 산신각 – 저수지 – 금병의숙 – 마을안길 우회로를 거쳐 다시 김유정문학촌으로 돌아오는 약 5.2km의 코스로,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다. 단, 김유정문학촌이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 1월4일까지 임시 휴관에 들어갔다는 점(12월28일 현재 공고 내용), 전체 코스 중 금병산 언저리 길 일부가 휴식년에 들어가 있다는 점, 마을안길의 통행이 여행자들이 만드는 소음 등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은 여행 전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단축된 실레길이야기 걷기가 감질나는 사람은 실레길에서 이어지는 금병산 등반도 생각해 볼 만하다. 해발 652m이지만 금병산 하단부 지표면 고도가 약 150m인 점을 감안하면 높은 봉우리도 아니고, 등산길로 잘 조성되어 있어서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다. 물론 겨울 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상에 오르면 주변의 눈 쌓인 산들, 의암호, 춘천시가 아스라히 보인다.
김유정문학촌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길 1430-14
▶양평군 문화유적길
부용산은 첫날밤에 방귀를 뀐 왕비를 부용산으로 귀양 보낸 왕과, 그렇게 귀양을 와 열 달 후 왕의 아들을 나은 왕비, 속 좁은 아버지가 야속한 왕자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성장한 아들은 아버지가 미워서 도성으로 들어가 저녁에 심었다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팔았다. 이 신비스러운 오이씨를 팔며 그가 한 말은, 아침에 오이를 먹으려면 밤 사이에 방귀를 끼면 안된다는 조건이었다. 이 소문이 왕궁까지 들어갔고 결국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과거 자신이 귀양 보낸 왕비 생각이 나 소년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고, 결국 자신의 왕자임을 확인한 후 그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왕은 왕비에게도 입궐을 권했으나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왕비는 끝내 왕의 청을 거절하고 부용산에서 생을 마친 뒤 부용산 정상에 묻혔다. 정상에 무덤은 없으나 아담한 꽃밭이 있고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이 바라보인다.
샘골고개를 넘으면 이제 신원리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 및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몽양 여운형은 1886년 바로 이곳 묘곡에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동학에 가담하는 등 진보적 가풍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의 계급사회를 굳게 지지했다고 한다. 훗날 여운형은 서울로 올라가 신문물, 신교육을 받았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 노비들을 전부 모아 그들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시켰다. 또한 양평에 광동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통해 근대 시민을 키워냈다. 훗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살아간 그는 남북좌우합작을 추진하다 결국 좌와 우 모두에게 외면당했고 1947년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여운형 생가와 기념관은 이렇듯 동학의 평등 사상인 천지인, 사회 개혁, 선교사와의 교류, 평양신학 등을 소개하면서, 사회개혁과 정치 학습을 쌓아가며 실천한 양평군 출신 여운형을 기념하고 그의 뜻을 오늘 되새기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몽양 여운형 생가 및 기념관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입장이 가능한데, 방문을 원한다면 코로나19 관련 문의를 한 후 결정할 것을 권한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
▶용인시 김대건길
한국 천주교와 조선 왕조는 잊을 수 없는 투쟁의 가시밭길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좋은 말씀이 있으니 함께 하자는 외국 선교사들과 속이 뻔한 서양 것들의 문명을 받을 수 없다며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대원군 중심의 개화기 조선 정부는 서로 무력을 사용하며 피 터지는 전쟁도 불사했다. 서구 열강은 군함을 앞세워 우리 백성을 향해 포탄을 날렸고, 대원군은 정조대왕 시절 이후 백성에게 스며든 서구 문명에 대한 호기심, 천주학에 대한 흠모와 탐구 현상에 치를 떨며 그 천주학도들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선교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김대건은 1844년에 부제 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845년 8월17일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천주교 조선 교구장 장조제프자아바티스트 주교로부터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가 된 진쟈상 성당은 2001년 중국 정부에서 지방법원을 짓기 위해 철거했는데, 건축물을 깨끗하게 해체하여 한국으로 들여와 은이성지 성당으로 복원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1845년 8월31일 페리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인천에서 함께 떠났던 신도들을 자신의 안드레아호에 태우고 조선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도착,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얻어 다시 출항, 최종 목적지인 금강 하류에 정박했다. 그는 곧장 길을 떠나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한편,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채 박해를 피해 전전하는 어머니를 모셨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기해박해 이후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김대건 사제는 그 와중에 어려운 사목 활동을 이어나가는 한편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왔다. 1846년 상해의 선교사 입국을 돕기 위해 만든 항해 지도를 중국행 어선 선장에게 넘기려다 순찰 중인 관헌에게 붙잡히며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결국 같은 해 9월15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바로 이튿날 지금의 양화대교 근처 새남터로 이송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를 구명하려는 움직임은 프랑스 선교사들은 물론 조선의 대신들 사이에서도 벌어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주교에게 ‘어머니를 부탁 드린다’는 유언을 남겼고,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라며 이 생에서의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김대건과 천주교 역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지는 그가 태어난 솔뫼마을, 그가 참수형을 당한 새남터, 그리고 귀국 중 배가 풍랑을 만났다가 닿은 것을 기념하는 제주도 한경면의 제주표착기념관 등이 있다. 물론 김대건이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학의 길로 들어선 용인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이 순교 전 마지막으로 미사를 집전했던 은이성지,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묻혀있는 미리내 성지 등은 김대건과 한국의 천주교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볼 수 있는 성지 중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골배마실 성지와 은이성지에서 출발하는 김대건길에서는 천주교 수원교구 안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공소인 고초골 공소와 함께 선교 활동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자들이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곳인 손골성지도 만날 수 있다. 손골성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도리 헨리꼬 성인과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을 기념하고 있다.
은이성지에서 10km쯤 걸으면 신덕고개가 나오는데, 그곳에 뜻밖에도 와우정사라는 절이 등장한다. 산속에 절이 있는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천주교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갑자기 절을 만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와우정사는 열반전에 누워계시는 세계 최대의 목불상과 사찰 입구에서 중생을 내려다 보고 있는 ‘불두’ 즉 부처님 머리상이 인상적이다. 불두의 높이는 8m인데 100m에 달하는 몸통은 시주를 걷어 완성하겠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완전히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새남터에서 처형된 후 양화진 인근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조선인 최초의 사제의 유해를 보전하기 위한 당시 천주교도들의 지극정성은 참말로 눈물 겹고도 남는다. 가매장 된 유해를 신도인 이민식이 몰래 파내 안성 미리내 성지에 안장했으나 훼손을 염려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 저곳으로 떠돌고, 때로는 머리와 몸통이 분리 안치되면서까지 보존되기도 했다. 그러다 천주교가 정식으로 인정되고 안정화 되면서 결국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자신의 신앙에 있어 고향이자 꿈터였던 골배마실의 미리내 성지로 돌아갔다. 지난하면서도 아름다운 회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미리내성지는 단순한 묘역이 아니다. 미리내 본당과 성지를 전담하는 성당이 있고, 김대건 신부는 물론 페레올 주교, 강도영 마르코 신부, 최문식 베드로 신부, 우슬라, 이민식 빈첸시오 묘지도 이곳에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 잔디광장,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십자가의 길, 12무명순교자 묘지, 성요셉 성당 등 미리내 성지 한곳에서만도 오랜 시간 사색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은이성지(출발지점)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미리내성지(도착지점)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위치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139-15(용인중앙시장) 운영시간 09:30~18:00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이영근, 춘천시청, 양평군청, 용인시청, 미리내성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2호 (21.01.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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