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華溪寺-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주는 곳
서울 북쪽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이 중에서도 동북쪽의 삼각산은 그 세가 예사롭지 않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혹은 국망봉이라 불리는 세 봉우리가 기세 좋게 뻗어 있어 이름 또한 삼각산이다. 국망봉은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무학 대사가 이곳에 올라 새 도읍터를 바라보아 ‘국망國望’이라고 한다. 이 삼각산에 유서 깊은 사찰 화계사가 있다.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인 10세기 중엽, 당시 국사를 지낸 탄문 대사가 부허동에 보덕암을 창건한 것이 시초다. 이를 조선 중종 때인 1522년 신월 선사가 남쪽 화계동으로 옮기며 화계사라 지었다. ‘화계사華溪寺’는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운, 즉 세 가지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라는 뜻이다. 절은 1618년 광해군 때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다음해 중창하고, 이후 고종 때 중수했다. 이때 궁중 최고 어른이던 조 대비가 시주를 했고 상궁들의 출입이 잦아 사람들은 화계사를 ‘궁(宮)절’이라 불렀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국제 포교에 힘쓴 숭산 행원이 1984년에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스님의 수행 공간을 마련하고, 2018년에 국제선문화체험관을 열었다.
한국 불교에서 ‘선禪’ 사상의 법맥을 이은 숭산 스님은 1972년 미국 동북의 로드아일랜드주로 갔고,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참선 수행을 공부하기 위해 스님을 찾아오면서 포교를 넓혔다. 이후 프로비던스 선원을 열고 세계 곳곳에서 한국 선불교를 전파했다. 숭산 스님은 세수 77세인 2004년 열반하셨다. 그의 노력으로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가 넘는 선원이 개설되었다.
화계사 정문인 일주문에는 ‘삼각산화계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는 길 옆에 작은 오탁천이 흐른다. 경내는 대적광전, 대웅전 등 크고 작은 전각이 있다. 황토와 연꽃 무늬가 아름다운 담장이 그 경계를 열고 닫는다. 공양간, 불교대학 강의실, 법당, 시민선원 등이 있는 대적광전은 1991년에 조성한 4층 건물이다. 대웅전 앞 요사채인 보화루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 신간호, 흥선 대원군의 글씨다. 화계사는 특히 흥선 대원군과 관계가 깊다. 흥선이 어느 날 절을 찾았다. 땀을 흘리며 걷고 있는데 동자승이 꿀물을 들고 그를 기다린다. 흥선은 꿀물을 마시고 만인 스님을 만났다. 만인 스님은 흥선에게 파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스님으로서 가람을 훼손하는 것이라 고심했지만 세도 정치를 끝낼 비밀을 알려준 것. 그는 충청도 덕산 가야사 금탑 자리가 제왕이 나올 자리니 흥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라고 한다. 이후 흥선은 아들이 고종이 되면서 대원군이 된다. 화계사에서는 느티나무 세 그루도 눈에 띈다. 무려 450여 년의 세월의 버티며 지금도 그 잎과 가지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화계사의 동종은 보물이다. 18세기 주종장으로 활약하며 8구의 동종을 제작한 승려 사인비구가 만들었다. 사인비구는 이 외에도 포항 보경사, 문경 김룡사, 홍천 수타사, 안성 청룡사, 양산 통도사, 의왕 청계사, 강화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특히 화계사 동종은 사인비구가 독자적으로 장인의 솜씨를 발휘했다. 참선수행의 도량답게 화계사를 찾아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코로나 시대 ‘값진 외출’이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화계사 공식 홈페이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2호 (21.01.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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