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에서, 도시 재생의 가능성을 보다

2021. 1. 12. 11: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좋은 도시를 위하여] 속초

[로버트 파우저 독립학자]
강원도 속초에 다녀온 건 지난 2019년 가을이다. 약 30여 년 만에 속초를 찾은 건 이곳의 아름다운 책방에서 그해 봄에 펴낸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의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덕분이었다. 1980년대 한국에 살면서 설악산 단풍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잠깐 들르긴 했지만, 제대로 속초를 다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준 곳은 속초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에 있는 '완벽한날들'이라는 책방이다. 오래된 상가를 리모델링한 뒤 책방 사장님이 큐레이팅한 책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위층에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꾸리면서 원도심의 재생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공간의 분위기와 책방의 지향점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속초 시민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 제안을 받을 때만 해도 대중교통으로 속초까지 갈 일이 약간 걱정이 되었다. 1980년대 도로 사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강원도 여행을 한 번 하려면 좁은 버스 안에서 교통 정체를 견디며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불필요했다. 고속도로가 새로 뚫려 서울에서 속초까지는 두 시간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우등고속버스 좌석이 편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서울에서 강화도 가는 것보다 훨씬 편리했다. 서울과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속초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속초해수욕장. ⓒ로버트 파우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버스터미널 근처를 좀 걷기로 했다. 낯선 지역에 가면 어떻게 동선을 잡을 수 있을까. 전주 한옥마을처럼 유명한 관광 명소는 쉽게 검색을 해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지만, 도시의 오래된 골목길에 대한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는 위성지도를 보며 오래된 집이나 상가가 밀집한 지역을 무작정 찾곤 한다. 특별한 정보가 없어도 그렇게 찾아가는 곳에는 그 지역만의 특징이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속초에서 무작정 찾은 곳은 아바이 마을이었다.
▲아바이 마을 벽화. ⓒ로버트 파우저

청초호와 바다 사이 모래밭에 형성된 아바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마을 육지를 연결하는 갯배가 생기면서 서민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한 곳으로, 한국전쟁을 겪으며 피난민들이 건너와 주민들이 급히 늘어났다. 오늘날 남아 있는 주택과 여러 건물 대부분은 1968년 홍수 피해를 겪은 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새로 지은 것들이다. 이에 비해 인근 해변인 속초해수욕장에는 1980~1990년대 분위기를 풍기는 상가와 호텔이 많다. 이 무렵 중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인들은 아직 해외 여행을 즐길 여유는 없었고, 대신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 속초해수욕장 인근의 건물들은 그 수요를 위해 지어진 것들이다.

아바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아바이마을 벽화거리’가 나온다. 반듯한 골목길에 단층 주택들이 나란히 서 있고 집집마다 화분이 내걸려 있다.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도시 오래된 골목길 어디나 쉽게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벽화'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언젠가부터 한국에 이런 식의 벽화 골목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벽화가 없는 오래된 동네를 찾기 어렵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주택가는 비교적 큰 도로와 이어지고, 제법 큰 상가를 만나기도 했다. 낚시용품 가게, 해산물을 파는 가게 등이 있긴 하지만 비어 있는 가게가 많아 골목은 전체적으로 활기를 잃은 듯했다.

▲아바이 마을 상가. ⓒ로버트 파우저

걷다보니 낮은 층의 주택가 사이로 불현듯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등장한다. 건물 사이 공간도 별로 없고 펜스로 둘러싸여 답답해 보인다. 뜻밖의 풍경에 조금 놀란다.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라면 별 생각 없이 지나쳤겠지만, 여기는 속초가 아닌가. 인구 8만 명 조금 넘는 이 도시에서 이렇게 높은 밀도로 좁게 살 필요가 있을까. 물론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땅이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울 같은 대도시보다는 형편이 나을 텐데, 굳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뭘까.

2010년대 미국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몇 가지 논의가 등장했다. 그 가운데 인구 밀도에 관한 것도 있긴 했지만 비중은 크지 않았다. 그저 어느 정도의 밀도로 사람이 모여 살아야 도시 생활이 즐겁다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땅이 넓은 몇몇 큰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 원도심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미국 상황에 맞긴 하지만 보편적인 논의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60년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1916~2006)가 미국 도시에 관해 언급하면서 도시의 활기를 만드는 여건으로 인구 밀도를 거론하긴 했지만, 적당한 인구 밀도에 대해서까지는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아바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 단지. ⓒ로버트 파우저

그런데 우리 모두 알고 있듯,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뉴욕을 비롯해 대도시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2020년 3~4월에 뉴욕 인구는 순식간에 30만 명이나 감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유층은 외곽의 별장으로, 일반인들은 외곽에 있는 가족들의 집으로 떠났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고층 아파트인 집에서 일하게 되니 사회적 거리를 지키기 어렵고,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 생활이 모두 멈춰버려 어떤 것도 불가능한 뉴욕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이에 비해 외곽의 넓은 단독 주택은 타인과의 거리를 지킬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산책과 운동을 하는 데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속초의 주택가 사이에 인구 밀도가 높은 아파트 단지가 섬처럼 등장한 것은 왜일까. 지역의 도시에서 이런 모습은 드문 사례가 아니다.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거주해온 주거지가 있고, 이 도시에서 최근 태어나 자란 사람들, 외지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며 유입되어온 이들이 원하는 주거지가 있다. 이렇게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형태의 주거 형태 속에서 삶을 꾸려나간다. 속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 있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이들이 있다. 서울과 부쩍 가까워진 덕분에 대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온 사람들이 또 있다. 이처럼 속초에는 다양한 이들이 모여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 속초를 다니며 나는 이런 특징이야말로 속초만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말하자면 속초는 토박이와 외부인이 섞이며 구분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다시 말해 '강원도 사람' 또는 '속초 사람'이라는 레이어 위에 '외지인'이라는 레이어가 쌓이는 형태가 아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섞여 살고 있다. 레이어가 매우 풍부한 셈이다. 이렇게 새롭게 유입되는 인구로 인해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야말로 속초의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과제는 뭘까. 도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위 상업지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구 밀도를 유지하기에 좋은 조건이 아닌 셈이다. 이러한 조건을 뛰어넘어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는 인구 분포와 그에 따른 경제적 활기를 어떻게 만들고 유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속초의 과제다. 이곳이 이미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레이어가 어쩌면 그 열쇠가 되지 않을까? 인구 유입의 다양성을 잘 활용하여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좀 더 열린 도시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속초만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이 되지 않을까? 예정된 북토크 시간에 맞춰 ‘완벽한날들’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속초해수욕장에서 본 고층 아파트 단지. ⓒ로버트 파우저

필자 소개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가 <프레시안>에 '좋은 도시를 위하여'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는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 등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외국어 학습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편집자.

[로버트 파우저 독립학자]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