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의 꼴값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우선 밝히면, 나는 ‘KBS에 2500원 내기 싫다’던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의 시각(2020년 8월12일자 조선일보 태평로)에 동의하진 않는다. 수신료를 더 내서 깊이 있는 탐사보도물과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언제든 무료로 쉽게 볼 수 있다면 간장 두 종지, 아니 자장면 두 그릇값 정도는 기꺼이 낼 생각이 있다. 수신료가 신문 월 구독료만큼 오르더라도 KBS가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외주사 쥐어짜기 행태를 말끔히 개선할 수 있다면 다른 지출을 줄이는 데도 불만이 없다.
수신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공영방송 서비스는 어떤 모습일까? 핀란드 공영방송 윌레(Yle)를 이용하다 보면, 좋은 콘텐츠와 서비스에 내는 돈은 수신료든 세금이든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핀란드 국민은 집에 TV가 있든 없든 윌레세(Yle tax)를 낸다. 덴마크(연간 44만원)와 스웨덴(17만원)처럼 16~70세 시청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개인 소득에 따라 최대 163유로(한화 22만원)로 책정된다. 연 소득 2800만원 이상이면 최대 금액을 내고, 1800만원 이하면 아예 내지 않는다. 개인별 세금형식으로 수신료 정책이 바뀐 점이 중요하다. 인터넷 기반 디지털 디바이스 이용자가 늘어난 변화를 반영했다.
핀란드 공영방송은 온라인으로 전 콘텐츠를 무료 제공한다. 검색 기능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기 쉽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업데이트도 신속하게 한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양질의 프로그램을 로그인 없이 시청할 수 있는 데다가 실황 콘서트나 영화도 제공해 웹사이트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어르신 시청자를 위해 전국을 돌며 인터넷 접속 방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직관적이라 어떤 형태의 디지털 접속이든 이용하기 편리하다.
잘 디자인한 웹사이트는 공익성과 다양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가 좋은 예다. 윌레 웹사이트에서 눈에 띄는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는 ‘어린이 광장(Lasten Areena)’은 0세부터 초등학생 정도 아이들이 이용하기에 좋은 온라인 콘텐츠 창고다. 수십여 가지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제작물을 광고 없이 시청할 수 있도록 해두었고, 시청 연령 등급도 잘 보이게 표시한다. 2020년 방영한 다큐멘터리 ‘로그드 인(Logged In)’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청년 다섯 명을 집중 조명해 화제를 모았다. 외로움, 담배, 마약, 디지털 중독, 빈곤과 같은 어려움에 둘러싸인 이들의 이야기를 공영방송이 아니면 누가 관심 가질까? 모두 온라인에서 쉽게 다시보기 가능하다.
KBS 웹사이트를 둘러보면 어린이 코너가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사교양’과 ‘예능’ 메뉴를 헤맨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다시보기 가능한 건 몇 편 없고, ‘핑크퐁과 호기’ 캐릭터 상품의 쇼핑몰 링크까지 첨부한 부적절한 프로그램 소개도 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다큐멘터리 3일이나 다큐인사이트와 같은 프로그램도 몇 단계씩 클릭해야만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찾으시는 다시보기 영상이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수시로 계속 뜬다. <차마고도>처럼 자사를 대표한다는 명작도 역시 유튜브에서 찾기 더 쉽다. 아무리 주 타깃을 텔레비전 시청자로 잡았더라도, 장기적으론 모바일 세대를 겨냥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미래세대의 시청행태 변화에 발맞출 디지털 콘텐츠 강화’는 KBS가 공개한 2019~2021 중장기계획 강조 내용 중 하나다. 수신료를 올리려는 이유에 이런 고민도 포함되어 있길 바란다.
끝으로 이 칼럼 제목이 살 오해도 막아본다. ‘꼴값’의 본래 의미는 ‘모양새나 됨됨이에 해당하는 값어치’라 한다. 안 좋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본뜻은 ‘가치’에 가깝다. “수신료의 가치, 감동으로 전합니다”란 문장을 종종 읽었다. KBS는 국민으로부터 모은 수신료를 운영 전반에 사용하는 공영언론사다. 그 수신료의 가치에 걸맞은 공적 영역에서 활약하면서, 디지털 미디어 서비스에서도 서둘러 경쟁력 갖추기를 바란다. 믿고 볼 수 있는 공영방송을 유지하는 데 한 달 4000원은 얼마 안 되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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