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광부가 금맥을 캐듯.. 천재는 글을 파내고 또 파냈다

기자 2021. 1. 1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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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말 말이 되어 날다, 52×32㎝ ,종이에 먹과 채색, 2021.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로댕의 발자크상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 (59) 파리와 소설가 발자크 (上)

자정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수도사 옷차림으로 집필작업

그렇게 쓴 글 인세 들어오면

화려한 집 짓고 연회로 탕진

빚 쌓이면 갚으려고 글쓰기

“천재가 이 짓이라니”자조도

중국에 재상 다섯을 길러낸 대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다섯 제자가 노스승을 찾아왔다. “저희 중 누가 가장 뛰어났습니까. 이제는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네 글자를 썼다. 장생구시(長生久視)! 말인즉슨 오래도록 살면서 가진 재능을 다 쓰고 가는 자가 가장 뛰어난 자라는 것이다. 현세 복락을 갈구하는 중국적 생사관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물론 천재 중 어떤 일생은 서른 살이고 어떤 일생은 구십 살이 되는 것이니 일생의 성취를 단지 그 생애의 길고 짧음으로만 잴 수는 없겠다.

소싯적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살아오는 동안 문득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예술, 결국 재능인가 힘인가, 아니면 힘과 재능인가. 이상(李箱)은 서른이 못 돼 죽었고 파블로 피카소는 구십이 넘게 살았지만 둘 다 천재로 불린다. 누구는 일순에 재능을 폭발시키듯 분출한 후 떠나버리고 누구는 쉼 없이 퍼내도 바닥이 안 보일 뿐 아니라 지치는 법도 없다. 문학계의 피카소인 오노레 드 발자크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그 괴력의 사내는 문학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사(力士)라 할 만하다. 그 발자크의 기운을 일순에 낚아채어 숨 쉬는 형상으로 빚은 이가 오귀스트 로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발자크’상이 10배는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근육질의 사내가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있는 것보다는 ‘반가사유상’에서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정신성을 느끼곤 했으니까. 그런데 로댕 미술관에 가서 그가 빚은 발자크상 앞에 섰을 때는 아, 싶었다. 그 덩어리가 마치 똘똘 뭉친 기(氣)의 운체(運體)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발자크 하면 산 하나가 떠오른다. 결코 푸근하거나 아늑한 산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험준한 봉우리를 거느린 악산(惡山)이다. 게다가 이 산은 중국의 여산(廬山)처럼 쉽사리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원근이 명료한 하나의 형상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 발자크의 험산 입구에서 나는 두 사람의 길라잡이를 만난다. 하나는 앞에 말한 조각가 로댕이고 다른 하나는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다. 둘 다 떠나온 출발점은 달랐지만 망치와 펜을 들고 발자크산을 오르며 꽤 진을 뺀 듯하다.

로댕은 1891년 문인협회장이었던 작가 에밀 졸라로부터 선배 문인이자 문화계의 거목이었던 발자크의 동상을 3만 프랑에 의뢰받는다. 금방 완성될 줄 알았던 그 조각은 무려 7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려서 나왔고 그마저 발자크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며 문인들로부터 퇴짜를 맞는다.

그를 기리며 조각상을 기대하던 후배 문인들은 이교도처럼 천을 휘감고 있는 배불뚝이 괴물에 대해 분노했고 결국 작품 인수를 거부했던 것. 그러다가 로댕 사후 20여 년이 된 1939년에야 제막식을 보게 된다. 그런데 발자크 가문의 체형과 두상까지 뒤지고 심지어 그가 다닌 양복점까지 찾아갔다는 로댕은 왜 이렇게 발자크를 기이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처음에는 얌전한 사실풍으로 시작했으나 그렇게 해서는 작가의 휘몰아치는 힘과 에스프리를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급기야 이 주문받은 동상을 비틀어서 자기류로 만든 다음 슬며시 살롱의 공모전에까지 내게 된 것이다(물론 낙선이었다).

세계적인 전기작가 츠바이크 역시 발자크 평전을 쓰기 위해 그 산문(山門)에 들어섰다가 무려 20년이 걸려서 겨우 그에 관한 얄팍한 책 1권을 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신이 발자크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것 같다는 자괴의 말과 함께.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험산을 단칼에 치고 들어온 이는 역시 빅토르 위고였다. 장례식에서 위고가 발자크를 평가한 그 몇 줄은 어떤 두꺼운 책보다도 가장 선명하게 그를 그려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강력하고 절대로 지치지 않는 노동자이자 철학자며 사상가고 시인이었던 천재는 우리 가운데 위대한 사람에게 그렇듯 주어진 운명의 태풍과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

발자크는 자정이면 일어나 오후 5시쯤까지 20여 년간 거의 매일 15시간 이상씩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글을 쓸 때면 수도사들이 입는 옷으로 바꿔 입고 작업을 했는데 이는 집필 중에만은 철저히 금욕하고 절제한다는 비장한 자기암시를 위해서였다는 것. “나는 무너진 굴속의 광부가 사력을 다해 곡괭이를 휘두르듯 그렇게 쓴다.” 20여 년의 집필 기간에 그가 마셨던 커피만 5만여 잔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이 지적 대식가이자 욕망의 활화산이었던 사람은 그러나 훗날 고백한다. 그렇게 노동하지 않고서는 산더미같이 불어난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먹고살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유명했고 쉼 없이 써댔던 그가 일평생 빚에 내몰리는 삶을 살아야 했을까. 원인은 그의 엄청난 사치와 낭비, 도박벽에 있었다고 한다. 평민 태생이었으면서도 귀족연했던 그는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혹은 겸손하게 사는 법’을 몰랐다. 돈이 들어오면 여행을 떠나기 위해 가방부터 꾸렸고 우크라이나·러시아·이탈리아까지의 호화여행을 즐겼다. 여행 중엔 쇼핑과 오페라, 화려한 성찬이 이어졌다(엄청난 대식가로 알려져 있다).

한창 인기가 올라 작품들이 팔려나가고 인세가 들어올 때는 화려한 저택을 짓고 연회를 열곤 했단다. 돈이 들어오면 강박적으로 소비했고 그러다가 바닥나면 명성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빌려다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갚기 위해 다시 칩거에 들어가 원고를 긁어대는 악순환이 시작되는데, 이 점에서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선인세를 끌어다 쓰며 쉼 없이 써야 했던 러시아의 글 노동자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빚쟁이에게 내몰리며 쓴 작품들 속에서 불세출의 명작들이 나왔다는 점이다. 천하 명문장치고 독촉에 의해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중국 속담을 어김없이 방증하는 대목이다.

글을 쓰다 지치면 발자크는 스스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지긋지긋하다. 천재가 돈 몇 푼 때문에 허구한 날 이 짓이라니….” ‘이 짓’, 그 먹고사는 비루한 일을 위해 소중한 재능을 끝없이 소비해야 하는 바로 그 짓에 대해 그는 이처럼 통분해 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훗날 샤를 보들레르는 “발자크가(家)의 모든 것은, 심지어 문짝 하나까지도 천재적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재능을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어쨌거나 그는, 그의 천재성이 생계 때문에 남용되는 것을 슬퍼했다. 더구나 글쓰기에만 국한돼 있지도 않았다. 연극 감독과 무대 설계며 의상 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었고 심지어 세간에는 ‘관상학의 대가’로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관상의 법칙은 정확하다. 그것은 성격뿐 아니라 존재의 유한함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어떤 기호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막상 본인의 수명에 대해서는 짚어내지 못했던 듯하다. 보들레르는 “그러나 그 ‘위대한 발자크’의 천재성은 도를 넘어 흐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는데 이는 그가 서너 가지 다른 필명을 사용해 각각 다른 경향의 글을 쓴달지, 철학이나 예술평론 쪽에 기웃대고 인쇄소와 신문사를 세워 경영 일선에 나서는 일(물론 다 실패한다) 같은 것을 이르는 것으로 짐작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천재를 일러 “자신이 부여받은 재능의 총량을 오랫동안 적절히 나눠 쓰며 가는 자”라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라면 발자크는 재능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분배에 실패한 천재였던 셈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평민이지만 귀족 행세하려 이름에 항상 ‘de’ 넣어 표기

-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 무대예술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그 이름 외에 오라스 드 생토뱅, 룬 경, 비예르글레 등의 다양한 필명으로도 글을 썼다. 발자크라는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원래 평민 출신이었지만 귀족으로 보이기 위해 이름에 늘 ‘드(de)’를 넣어서 썼다는 것. 1819년 소르본 법과대를 졸업했지만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에서 단칸방을 얻어 집필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데뷔작으로 쓴 희곡 ‘올리버 크롬웰’은 전혀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실패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평생 작가의 생애를 살기로 하면서 심지어 나폴레옹 동상에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라고 낙서하며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문학적 열정 외에 대단한 탐식가였으며 카페인 및 도박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잠을 줄여 글을 쓰기 위해 커피를 하루 수십 잔씩 마시며 줄기차게 집필활동을 이어간다. 소설, 시, 희곡, 평론 등에 걸쳐 방대한 작업을 했는데 ‘외제니 그랑데’ ‘고리오 영감’ 등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꼽힌다. 빚에 쪼들리며 글을 쓰느라 독한 커피를 계속 마셨는데 건장했던 그가 사망했던 데는 카페인 중독 때문이었다는 의학적 견해가 있다.

파리 8구에 발자크 거리(Rue Balzac)가 있다. 도시 투르, 파리에 기념관이 있는데 파리 르누아르 거리 47번지 기념관 3층 건물에는 그의 원고며 가구, 초상화, 사진 등이 진열돼 있다. 그 건물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는데 빚쟁이가 앞문으로 나타나면 뒷문으로 도망치기 위해 생전 구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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