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생리'입니다
제28화 생리대 광고
“생리대는 가문의 원수에게도 빌려준다”는 인터넷 밈(meme)이 최근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받았다. 생리(월경)라는 공통된 경험 때문에 여성은 설령 원수일지라도 ‘피자매’가 된다. 생리는 가임기 여성의 몸을 지배하는 변치 않는 생식 활동이지만, 생리와 생리대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은 곧 ‘여성 정치’의 역사이기도 했다.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격동의 세월’을 겪은 생리대의 역사를 살펴봤다. 해설 박수지
2018년 국내 영상광고서 ‘생리’를 처음으로 ‘생리’라 불러충격적으로 늦은 ‘생리 호명’
비싼 생리대가 부른 ‘양극화’업체들 제품 가격인상 철회가장 절박한 요구는 ‘안전’
2018년, 국내 생리대 영상 광고에서 처음으로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71년 유한킴벌리가 국내 최초로 일회용 생리대 ‘코텍스’를 처음 생산·판매한 이후, 모든 생리대 업체가 줄곧 “생리대는 여성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페미니즘 가치를 강조한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때늦은 ‘생리 호명’이 얼떨떨하다.
이전까지 광고 속에선 생리대를 쓰면 격렬한 운동도 할 수 있다면서도, 생리 자체는 늘 ‘그날’이나 ‘마법’으로 불렸다. 2019년엔 유한킴벌리와 라엘 등의 광고에서 생리혈을 빙자한 ‘파란 액체’까지 퇴출됐다. 대신 실제 생리혈에 가까운 붉은 액체가 나온다. 생리대에 ‘파란 액체’가 등장한 것도 30년 가까이 된 얘기다.
코텍스는 1989년까지 국내 시장점유율 60%대로 독보적인 1위 제품이었지만, 그해 피앤지의 위스퍼가 들어온 뒤 상황이 달라졌다. 위스퍼는 5년 만인 1994년 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당시 피앤지가 파란 액체가 생리대에 흡수되는 과정을 타 제품과 비교하는 광고전략이 효과를 봤다는 분석이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유한킴벌리는 1995년 10월 새 제품 ‘화이트’를 출시했다. 때마침 생리대 티브이 광고도 다시 허용되기 시작했다. 일반 대학생 모델을 내세워 ‘깨끗함’을 강조하는 마케팅에 힘입어 1999년 다시 점유율 1위를 꿰찼다. 생리대 방송 광고는 1970년대까지 가능했지만, “가족끼리 보기 낯부끄럽다”, “퇴폐 광고다”라는 일부 여론 탓에 1980년부터 한국방송협회의 자율규약에 따라 중단됐었다.
1995년 이후 생리대 광고 속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무려 흰 원피스(!)까지 입고 뛰어다니던 그녀들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생리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맑고, 깨끗하게’만 그리려고 했던 생리대 회사들의 안일함이 도리어 요즘 세대의 ‘자기 몸 긍정하기’(보디 포지티브) 추세에 역행하는 ‘생리 혐오’로 읽혔던 탓이다. 한겨레 아카이브의 사진과 광고 이미지를 보면, 현실 속 여성의 생리에 가까운 광고가 나오기까지 여성들의 ‘생리권’과 관련한 고군분투는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한국 여성은 약 40년간 생리대를 모두 1만개 이상 쓴다. 1년 평균 250개가 넘는다(여성환경연대). 이런 이유로 정부는 생리대를 생활필수품으로 보고, 2004년부터 부가가치세 10%를 면제해주고 있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생리대 면세’도 여성운동의 결과였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002~2003년 “1300만 여성의 필수품인 생리대에 대한 부가세를 면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이에 국회에서도 여야 관계없이 생리대 조세를 면제해주는 법안을 제출하며 화답했다.
<한겨레> 2003년 8월4일치 기사를 보면 이에 반대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의 논리가 황당해서 재밌다. “여성단체 주장대로라면 속옷, 화장품, 면도기 같은 물품에도 부가세를 물리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생리대와 화장품을 동일 선상의 필수품으로 분류한 재경부 공무원들의 ‘세제 논리’도 ‘시대의 흐름’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생리대가 면세 제품이 됐다고 해서 모두에게 가격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리대 시장은 프리미엄 경쟁이 파이를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으니 비쌀수록 안전하다는 인식이 만연해서다. 생리대 업체는 2~3년에 한번씩 가격을 올렸고, 중형 생리대 한팩(36개) 가격이 평균 6천~9천원 선에 이르렀다. 그러던 2016년 5월, 업계 1위인 유한킴벌리가 생리대 가격을 올린다고 발표하자 ‘생리대 양극화’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이른바 ‘깔창 생리대’ 등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비싼 생리대 때문에 휴지를 대신 쓰는 등 전전긍긍하는 사연과 고백이 이어졌다.
여론의 질타에 유한킴벌리는 제품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기존 생리대보다 공급가가 30~40% 싼 중저가 제품을 내놨다. 유한킴벌리 관계자들은 그해 10월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국내 업체들이 중저가 시장에 신경을 충분히 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저렴한 일반형 제품을 만드는 노력이 병행돼야 더 완성된 기업,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이는 생리대 가격 인하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한겨레> 2016년 7월4일치 기사를 보면,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시작된 ‘#생리대를붙이자’ 운동 제안에 서울 인사동 길거리 벽에는 ‘피’(붉은색 물감) 묻은 생리대가 나붙은 현장이 묘사된다. 생리대 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임신과 출산은 고귀하지만 생리는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까’ 같은 문구가 함께 적혀 있었다.
생리대와 관련해 여성 소비자의 가장 절박한 요구는 안전일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에 불거진 안전성 논란은 2017년 3월 여성환경연대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그해 12월, 국내 생산·수입된 666개 제품을 전수조사한 결과 생리대의 화합물이 인체에 유해성이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떠들썩했던 생리대 위해성 논란이 일단락됐지만, 단지 여성 소비자들이 과연 주관적으로 민감해서만일까. 생리대 안전에 관해서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불신의 역사가 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1988년 12월21일치에도 ‘1회용 생리대에 유해성분 포름알데히드 일본 규제치 2배’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중앙대 남상우 교수(가정교육학)가 시판 중인 일회용 생리대 18개 제품을 조사한 결과, 2개 제품에 일본의 포름알데히드 규제치(시료 1g당 75㎍ 이하)에 비해 2배를 웃도는 함량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국내에는 관련 기준이 없었다.
이후 기준이 생긴 뒤에도 2006년엔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시판 생리대 6개 제품에서 포름알데히드 기준을 위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생리대는 1971년 의약부외품으로 지정된 이후 당시까지 ‘수거검사’가 실시된 적이 없었다. 이후 여성·환경단체는 생리대 전체 성분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해왔지만, 당시 기업들은 ‘기밀’이라며 거부했고 국회와 정부도 미적댔다. 결국 2017년 생리대 파동 이후 입법을 거쳐 2019년 10월에야 생리대 전성분 표시제가 시행됐다.
여성들의 ‘애증의 반려물품’ 생리대를 대상으로 언제쯤 운동과 정치를 그만할 수 있을까. 1999년 열린 1회 월경페스티벌 기사에 인용된 고전의 구절에서 답을 찾는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부럽고도 자랑할 만한, 남성적인 일이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많이 하는지 자랑삼아 떠들어 댈 것이다. 의회는 국립월경불순연구기금을 조성하고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할 것이며, 생리대는 연방정부가 무료로 나눠줄 것이다.”(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1983)
▶ 28화 해설자인 박수지 기자는 2013년 <한겨레>에 입사해, 보건복지·여성, 사건, 금융 분야에 이어 현재 산업부에서 유통업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급변하는 유통산업과 소비자의 인식 변화 등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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