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가시가 있다고 욕하지 말자

한겨레 2021. 1. 12. 07: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휴심정] 고진하목사의 불편당 일기]불편당 일기16: 엉겅퀴

엉겅퀴꽃

가을걷이가 끝난 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스님이 머무는 암자를 찾아갔다.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했고, 암자로 오르는 길엔 낙엽이 잔뜩 쌓여 푹신한 카펫을 밟는 기분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데, 미리 연락을 받은 스님이 마중을 내려왔다. 스님의 손엔 삽과 괭이 같은 연장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공손히 합장을 한 후 두 팔을 벌려 스님을 반갑게 끌어안았다.

“스님께서 마중을 다 나와주시구!”

“당연히 나와야죠. 형님!”

동생 뻘인 스님은 나를 형이라 부른다. 십여 년 전에 만난 우리는 서로 종교가 다르지만 종교간의 울타리를 허물고 살아야 한다는 데 뜻이 맞아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은 이 아우 보러 온 게 아니시죠?”

“아니, 무슨 말씀을! 이 암자에 기거하는 물상 가운데 스님 아닌 것들이 뭐가 있단 말이오! 나무-스님, 풀꽃-스님, 새-스님, 돌-스님, 냇물-스님, 땅-스님, 하늘-스님, 구름-스님…”

내가 불쑥 건넨 말이 맘에 든 걸까. 스님은 박장대소했다. 스님과 함께 다시 산길을 오르는데, 길가에는 잎이 마르고 키가 큰 엉겅퀴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엉겅퀴 우듬지엔 잘 여문 씨앗들에 매달린 갓털(씨방의 맨 끝에 붙은 솜털 같은 것)이 곧 날아가기라도 할 듯 바람결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길가의 엉겅퀴는 놔두고 스님이 채소 농사를 짓는 밭 옆의 엉겅퀴 군락지로 들어섰다.

“형님, 엉겅퀴는 우리 절의 보물인데… 그럼 한 번 캐볼까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데…!”

“우물을 파는 게 쉽지 않아요. 제가 좀 거들어 드릴게요.”

스님은 손수 농사일로 생계를 꾸려 가고 그걸 또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분. 나는 삽을, 스님은 괭이를 들고 엉겅퀴 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오래 묵었는지 잔돌들이 많은 딱딱한 땅에 박힌 엉겅퀴 뿌리는 쉽사리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일에 숙련된 스님의 힘찬 괭이질 덕분에 두어 시간 동안 굵은 엉겅퀴 뿌리를 원하는 만큼 캘 수 있었다.

엉겅퀴

다 캔 엉겅퀴 뿌리를 포대 두 개에 담고 나니, 스님이 집에 들어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스님이 집 뒤꼍 항아리에서 떠와 내놓은 차는 엉겅퀴 잎과 줄기를 설탕으로 재워 발효시킨 것이었다. 달콤쌉싸름한 엉겅퀴 차를 함께 마시고 난 스님은 기분이 좋은지 문득 소리 한 자락 해도 되겠냐고 했다. 평소 노래를 즐기시는 스님은 자작곡해 부르는 노래가 많다. 얼쑤! 좋다며 내가 박수를 치자 스님은 통기타를 들고 나와 동향 시인의 민요시로 만든 소리 한 자락을 구성지게 들려주었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잃고 홀로 사는 엉겅퀴야

갈퀴 손에 호미 잡고 머리 위에 수건 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부르는 이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 두고 어딜갔소 쑥국소리 목이 메네

-민영, <엉겅퀴꽃>

일찍이 남편 잃고 홀로 사는 시골 아낙의 신산한 삶을 엉겅퀴에 빗대어 노래한 시조인데, 신명 넘치는 스님의 목소리로 들으니 전혀 슬프지 않았다. 스님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동안 자줏빛 엉겅퀴 꽃과 노래의 여운이 오래도록 귓가에 쟁쟁했다.

엉겅퀴는 국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우리나라의 산이나 들에 저절로 나서 자란다. 키는 1미터쯤 자라고 잎에는 뻣뻣하고 억센 가시털이 나 있다. 6월에서 8월 사이에 자줏빛이나 붉은빛의 큼직한 꽃이 피며 10월이 되면 열매가 익는다. 꽃은 지름이 4〜5센티미터로 줄기 끝에서 피어난다. 씨는 길이가 7밀리미터쯤 되고 흰색 갓털이 붙어 있다. 잎은 길쭉하게 생겼으며 잎줄기를 중심으로 작은 잎이 새 날개 모양으로 6~7쌍씩 갈라져 있다. 잎의 양면에는 흰 털이 많이 나 있고, 가장자리에 거친 톱니와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다. 줄기는 곧고 움푹 골이 패어 있으며, 원뿌리가 땅속 깊이 내려가므로 가뭄이 들어도 잘 자라는 편이다. 엉겅퀴는 억세고 강인한 식물이어서 여간해서는 병이 들거나 죽지도 않으며, 수십 년을 산 것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수명도 길다.

엉겅퀴 무침.

엉겅퀴는 종류가 무척 많다. 우리나라에는 큰엉겅퀴, 지느러미엉겅퀴, 초엉겅퀴, 가시엉겅퀴, 흰가시엉겅퀴, 바늘엉겅퀴 등 수십여 종이 있고, 중국과 대만, 일본, 러시아, 유럽에도 분포한다. 여러 종류의 엉겅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큰엉겅퀴와 지느러미엉겅퀴가 약효가 제일 좋다. 오늘 내가 암자 부근에서 채취한 엉겅퀴는 지느러미엉겅퀴인데, 강원도 산 엉겅퀴가 약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써 오래전에 독일의 한 제약회사가 엉겅퀴에서 추출한 물질로 간질환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였고, 그 효능이 뛰어나서 일 년에 수천 억 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 제약회사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엉겅퀴의 약효를 분석 비교한 결과가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난 엉겅퀴가 독일에서 자란 엉겅퀴보다 약효 성분이 여섯 배나 더 많다고 한다.

엉겅퀴는 맛이 쓰고 달고 떫으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 간과 신장, 심장, 폐, 대장에 들어가서 약효를 발휘한다. 간을 해독하고 피를 맑게 하며 어혈을 풀어주고 종기를 삭이며 혈액을 생성하는 등의 작용을 한다. 엉겅퀴는 순우리말 이름인데, 피를 엉기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따라서 엉겅퀴는 지혈작용도 뛰어나다. 코피, 자궁출혈, 치질로 인한 출혈, 직장암이나 직장 궤양으로 인한 출혈 등 모든 출혈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

엉겅퀴는 잎과 줄기, 뿌리를 다 식용할 수 있다. 섬유질,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회분, 무기질, 비타민 등이 고루 들어 있어서 음식 재료로 전혀 손색이 없다. 우리 집에서는 봄철이나 초여름에 연한 어린잎을 뜯어 뜨거운 물로 살짝 데쳐서 쓴맛을 우려내고 나물로 무쳐 먹는다. 또 어린잎과 줄기를 뜯어서 유기농 설탕에 재워 발효시키면 일년 내내 건강음료로 마실 수도 있다.

엉겅퀴는 가을철에 전초를 채취하는데 뿌리의 약효가 제일 좋다. 늦가을이나 겨울철 땅이 얼기 전에 캐야 한다. 내가 암자 산기슭에서 캐온 엉겅퀴 뿌리는 잘 씻어 말려 차로 끓여 마실 작정이다. 엉겅퀴 씨도 차로 끓여 마실 수 있다. 엉겅퀴 씨를 받으려면 채취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씨앗이 여물면 씨앗에 달린 가벼운 갓털과 함께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엉겅퀴 씨를 차로 끓여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숙면에도 도움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 먹으면 뼈가 무쇠처럼 튼튼해지고 면역력이 좋아져서 어떤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깃털 속에 있는 엉겅퀴 씨앗

얼마 전 나는 암자에서 캐다 말린 엉겅퀴 뿌리를 차 재료로 쓰기 위해 그 마지막 단계로 뿌리를 작두로 썰고 있었는데, 문득 엉겅퀴 꽃말이 궁금해졌다. 나는 즉시 서재에 있는 식물도감을 꺼내 엉겅퀴 꽃말을 찾아보고는 혼자 킬킬대고 웃었다. “(날) 건드리지 마세요!” 누가 자신을 건드리는 게 싫다는 뜻에서 그런 꽃말이 붙여진 걸까. 아니면 자신을 만지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염려가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걸까. 하여간 가시로 무장한 엉겅퀴의 생태를 잘 반영한 꽃말임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나는 엉겅퀴 잎을 뜯다가 몇 번 손을 가시에 찔린 경험이 있다. 엉겅퀴 잎에 붙어 있는 가시는 매우 날카롭고 억세다. 엉겅퀴 가시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것보다 훨씬 더 아프다. 가시 끝에 독이 있기 때문이다. 엉겅퀴를 채취할 때는 그래서 두툼한 가죽 장갑 같은 것을 끼고 뜯는 게 좋다. 창과 방패로 완전무장한 군인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엉겅퀴. 다른 식물의 가시도 그렇지만 엉겅퀴의 가시는 스스로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기다. 자기 몸에 좋은 영양분과 약효를 많이 지니고 있는 엉겅퀴는 초식동물들이나 곤충들의 먹이가 되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가시로 무장하고 있는 것. 어린 시절 나는 소를 고향의 강둑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이는 목동 노릇도 했는데, 억새나 갈대 같은 억세고 질긴 풀들을 잘 뜯어먹는 소도 가시를 지닌 엉겅퀴는 절대 건드리지 않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들꽃이거든 가시 돋힌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 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복효근, <엉겅퀴의 노래> 부분

이 시를 곰곰 새겨보면 시인은 엉겅퀴의 속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듯싶다. 미처 자라기도 전에, 혹은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기 전에 ‘함부로 꺾으려 드는 손길’을 향해 엉겅퀴는 가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는 것. 그런 자기 보존본능을 통해 엉겅퀴는 비로소 자기 존재를 완성하고 타자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시가 있다고 미워하지 말자.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가시 몇 개쯤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은가. 성경의 현자도 자기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의 자세라며 이렇게 설파했다.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언 4:23)

가시가 있는 식물은 대개 독이 없고 그 몸에 좋은 약효를 지니고 있다. 엉겅퀴야말로 가시로 울타리를 두른 부호의 보물창고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소중한 서식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돈이 된다고 하면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무작스런 난개발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광휘가 저 산기슭이나 들판에 저절로 자라는 야생초에 깃들여 있음을!

글 고진하 목사 시인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