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꽃의 작가' 박완서 10주기, 분꽃·싱아가 그립다
박완서는 2002년 한 독자모임에서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작가는 분꽃이라고 했다. 그 많은 꽃 중에서 왜 분꽃을 가장 좋아했을까. 이제 작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다만 작가가 분꽃에 친근감을 느끼며 이 꽃을 특별히 여긴 것은 확실하다. 산문집 ‘두부’에서 작가는 구리 노란집으로 이사한 해(1998년) 늦은봄, 심지도 않았는데 분꽃이 여봐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내 아득한 유년기로부터 나를 따라다니다가 이제야 겨우 현신(現身)할 자리를 얻은 것처럼 느껴져 반갑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며 “오랜 세월 잊고 지냈지만 분꽃은 나하고 가장 친하던 내 유년의 꽃”이라고 했다. 작가의 소설이나 산문집에는 어릴적 분꽃이 피는 것을 지켜보거나 손으로 펴려다가 실패한 일화를 들며 손독·눈독을 경계하는 글이 많다.

박완서 소설에는 꽃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꽃이 많이 나올뿐 아니라 꽃에 대한 묘사, 특히 꽃을 주인공 성격이나 감정에 이입하는 방식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탁월하다. 대표적인 소설이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능소화는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현금처럼 ‘팜므파탈’ 이미지를 갖는 꽃이다. 능소화를 ‘분홍빛 혀’, ‘장작더미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하는 등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능소화에 주제까지 담았다. 고(故) 서울대 김윤식 교수는 이 소설 평을 쓰면서 “능소화를 인간으로 바꾸어 이름을 현금이라 한 것은 소설적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친절한 복희씨’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만큼 박태기나무꽃의 특징을 잘 잡아내 묘사한 소설을 찾을 수 있을까. 주인공 할머니는 결혼 전 가게에서 식모처럼 일할 때, 가게 군식구 중 한 명인 대학생이 자신의 거친 손등을 보고 글리세린을 발라줄 때 느낀 떨림의 기억이 있다.
<나는 내 몸이 한 그루의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았다. 봄날 느닷없이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직접 진홍색 요요한 꽃을 뿜어내는 박태기나무. 내 얼굴은 이미 박태기꽃 빛깔이 되어 있을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그런 황홀한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버스 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순박한 시골 처녀가 처음 느낀 떨림을 박태기꽃에 비유해 어쩌면 이렇게 생생하게 그릴 수 있을까. 작가의 이 표현으로, 박태기나무꽃은 화단의 흔하디 흔한 꽃에서 ‘황홀한 감각’을 숨긴 꽃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싱아는 이제 박완서 소설의 상징과도 같은 식물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는 시큼한 여러해살이풀 싱아가 여덟 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고 있다. 이 소설이 15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이제 싱아를 잘 모르는 국민은 있을지 몰라도 싱아를 들어보지 못한 국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다른 예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남자네 집’에선 성신여대 근처 한옥을 기웃거리다 보리수나무를 보고 50년 전 첫사랑의 집임을 확신하고 있다. ‘거저나 마찬가지’에선 여주인공이 하얀 꽃이 만개한 때죽나무 아래에서 실속을 못 챙기고 이용만 당하는 삶의 태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 여자네 집’에선 꽈리가 옛 연인을 지키는 ‘꼬마 파수꾼의 초롱불’로 등장하고 있다.

능소화, 박태기나무, 싱아, 꽈리는 물론 흔하디 흔한 분꽃·채송화까지도 박완서 손길이 스치자, 승은을 입은 궁녀처럼 더 이상 그냥 꽃이 아니다. 박완서가 소설에 끌어들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문학적인 상징까지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에는 가차 없는 시선을 보내지만, 주변 꽃은 한없는 애정으로 바라보며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작가가 꽃을 슬쩍 지나가듯이 언급했는데도 격이 확 높아진 작품도 많다.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명랑하게 조잘대는 시냇물 위로 점점이 떠내려오는 복사꽃잎을 떠올렸다’는 문장이 있다. 딱 한번 ‘복사꽃잎’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화사하면서도 요염한 복사꽃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얼마나 보석같은지 알 것이다.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사량도 선주(船主)와 사랑에 빠진 사촌동생, 이런 사촌동생의 말을 들으며 화자가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도 행운목 꽃은 단 한번 나오지만, 참척을 당한 어머니의 아픔, 마치 자식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부를 것만 같은 어미의 심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다.

천의무봉의 작가, 탁월한 이야기꾼, 한국 문학의 축복, 영원한 현역 작가 등 박완서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다 작가의 수식어로 손색이 없지만, 필자는 꽃을 사랑하고 꽃에 대한 묘사도 탁월했던 작가에게 ‘꽃의 작가’라는 수식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오는 22일이 박완서 작가의 별세 10주년이다. 작가는 2011년 1월22일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박완서 정도의 작가라면 지금쯤 10주기 추모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마땅할텐데…. 신종 코로나 때문인지 10주기 관련 책 몇권 나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행사도 없는 점이 안타깝다.
◇필자가 박완서와 꽃에 대해 쓴 글들
[김민철의 꽃이야기] 박완서, 엄마의 꽃으로 감자꽃 골랐죠
[김민철의 꽃이야기] 꼬마 박완서가 찾아 헤맨 싱아, 꽃이 피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박완서 소설과 슈베르트 가곡의 보리수… 同名異木
[김민철의 꽃이야기] 분꽃, 오후 4시면 피어나는 추억
[김민철의 꽃이야기] 만발한 홍자색 박태기꽃, 박완서가 그립다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재테크, 부동산, IT, 책, 영어 학습, 종교, 영화, 꽃, 중국, 군사 문제, 동물 등 16가지 주제에 대한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조선닷컴으로 접속해주세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럼프, 이란 공격 확대 시사... “오늘 매우 강한 타격 입을 것”
- 이란, 걸프국 공격 멈춘다... 트럼프 ‘항복’ 요구엔 거절
- 李대통령이 언급한 ‘마약왕’... “교도소에 애인 불러 논다더라”
- ‘5000억원 사나이’ LIV 욘 람, 홍콩 대회 3R 1위 질주
- 美 “러시아가 이란에 미군 위치정보 넘겼다”
- 野 “주한미군 전력 차출 가능성에 안보 불안”…與 “정쟁 말라”
- 인도네시아도 16세 미만 SNS 계정 막는다
- 한동훈 “윤 어게인 노선 끊고 보수 재건해야…부산 대역전 필요”
- 한일전 앞둔 류지현… “4경기 중 하나일 뿐, 경천위지로 준비했다”
- “미친 늙은이”라더니... 미국, 이승만 결단에 감동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