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일 관계 악화, 위기의식조차 없는 정부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2021. 1. 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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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한 지난 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고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해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했다. 우리 법원의 이번 판결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의 근간을 흔들 만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강제 징용 문제에서도 지금까지 인정되지 않았던 군인·군속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 가능성이 생겨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이번 위안부 판결은 2018년 10월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 이상으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전개될 한·일 대립의 결말은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의 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한·일 관계 해빙기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이대로 방치하면 한·일 단교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의 감정 대결은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마저 발동되면서 관계 악화에 대한 위기의식조차 없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은 1965년 기본 조약의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 보완 조치를 취하면서 관계가 발전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역청구권을 주장했던 일본 정부도 한국의 끊임없는 노력에 양보를 해왔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 아시아 국민의 피해와 고통에 사죄하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 공동 선언, 2010년에는 급기야 한국을 직접 언급하여 사죄한 간 담화로 이어졌다. 불충분하지만 아베 총리조차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책임을 인정했다. 한국이 일본의 법적 책임을 도의적이고 인도적인 측면에서나마 인정하게 만듦으로써 한·일 관계는 발전할 수 있었다.

최근 한·일 양국에서는 이러한 한·일 관계의 흐름을 잘못된 역사의 과정이라고 보는 인식이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어정쩡한 타협을 함으로써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비판한다. 일본 또한 한국과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참에 약간의 피해가 있더라도 한·일 관계의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있다. 이번 판결로 양국에서 원리주의자의 주장이 거세질 것 같아 우려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일 양국이 해온 노력을 부정하기보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한·일 관계의 역사는 상대방을 비난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공생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았던 것이다. 이번 위안부 판결은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그리고 강제 징용 문제 때처럼 사법부의 판단이라고 문재인 정부가 ‘강 건너 불구경’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지난 2년간의 한·일 관계가 말해주고 있다.

당장 문 정부는 한·일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일본과 역사 화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죄와 반성이 먼저라는 주장만으로는 일본을 설득할 수 없다. 장기적인 시야에서 역사 화해를 할 수 있는 교육, 상징적인 조치 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국익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정치적 해결이 어려워지면 국제법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져야 한다. 최근 양국 국민의 감정은 정치적 타협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판결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고려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일 양국이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려면 국제사법재판소를 마냥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해법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없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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