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문화경제시대] 연극이여, 버텨줘서 고마워
삶의 무게 실은 노배우 210분 열연, 연극만이 가능한 감동 줘
영화·드라마도 원천은 연극.. '문화경제'도 연극이 버텨줘 가능
“자, 이번에는 어느 놈과 다시 놀아볼까?”
파우스트의 영혼을 신에게 빼앗긴 메피스토펠레스가 “참, 더러워서 악마 짓도 못 해먹겠네”하며 잠시 실망을 하다가, 다시 기운을 내서 뱉은 말이다. ‘악의 성실성'이라는 말이 잠시 생각났다. 문득 50년간 연기를 한 배우 정동환에게서 내가 들은 마지막 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2차 유행이 잠시 잦아들고 3차 유행이 시작되기 전,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나진환(성결대 교수)이 연출한 극단 피악의 1인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를 보았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차남 ‘이반'에게서 ‘대심문관’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왔고, 이름 정도는 모를 사람이 없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갈등이 기본 구조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얘기들이다.
정동환 1인극이지만, 나름 블록버스터급이다. 대극장 무대가 2층으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물이 담긴 수조가 파우스트의 고뇌를 상징하고, 배우의 분장실 같은 2층의 작은 공간은 연신 분장을 고치며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파우스트를 상징한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차남 ‘이반'과 3남 ‘알로샤' 형제의 치열한 논리 싸움이 펼쳐진다. 다시 돌아온 예수에게 “귀찮게 뭐하러 왔느냐”고, “다시 우리에게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스페인 종교재판의 대심문관은 악의 근원을 보여준다. “아, 나, 예수야!” “알아, 그런데 뭐하러 여기 왔냐고? 걸리적거리게.”
패러독스의 백미를 보여주는 대심문관과, 부친 살해로 얽힌 이반과 알로샤 형제, 그리고 욕망의 질주를 보여주는 파우스트를 연결하는 이야기의 사실상 주인공은 메피스토펠레스이다. 그래서 연극의 마지막에 파우스트를 신에게 빼앗기고 다시 다음 파트너를 찾아나서는 대사는 현실적이며 철학적이고, 또한 희극적이다. 코로나 한가운데에서 보게 된 연극에서, 중학교 때 읽다가 포기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고등학교 때 뜨문뜨문 읽은 ‘파우스트', 뭣도 모르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나의 소년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이야기도 잘 정리하지 못하고 극장을 나섰는데, 이 연극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2주 전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돈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떠올리다가, 역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했다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문득 생각났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얘기의 모티브에 분명 정동환의 연극이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영화는 메피스토펠레스 얘기를 이렇게 정색을 하고 ‘스탠딩 샷'에 ‘장타 대사'로 처리하지 못한다. 그래서는 투자도 어렵고, 관객들 전부 극장에서 졸 것이다. ‘어벤져스’의 주인공 ‘떼 샷’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곰곰이 자기가 읽은 책들과 실존에 대해서 했던 고민들을 돌아보게 하는 장타 대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거움이다. 그러나 연극은 다르다. 눈앞에 배우가 있고, 살아 숨쉬며 직접 연기를 한다. 70이 넘은 배우가 찬물에 10분 넘게 들어가서, 저 긴 대사를 처리하고, 인터미션 없이 210분 연기를 하는 체력을 보며 삶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감동을 하게 된다. 그게 현장의 맛이다.
팬데믹 한가운데에서도 연극을 끊임없이 만들고, 손해를 감수하고 극장에 올리는 걸 보면서 “연극은 무엇에 도움이 되는가?” 질문해 보았다. 지난 국감 자료로는 공연예술 분야 코로나 피해 추정액이 1967억원 정도 된다. 그나마 최근에는 공연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시름이 깊어간다. 연극은 영화와 드라마에 모티브와 스타일은 물론이고 배우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후방 문화산업이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의 원천 산업으로 연극이 존재하기에 한국 예술문화의 한 축이 작동하는 것 아닌가?
좋은 배우와 좋은 연출가들이 연극계에는 아직도 득실득실하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놓고 ‘문화 경제'라는 발상이 가능한 것은, 어렵지만 코로나 한가운데에서도 연극이 아직 버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연극이 아직 버티고, 어렵게 무대에 올라간 연극을 즐겁게 보는 관객이 존재하는 한, 한국 경제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간만에 지적 충격을 준 노배우 정동환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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