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비겁했던 前 대통령 사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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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대통령 사면론 띄운 文정권… 여론 간보다 지지층 반발에 후퇴
아무 감동없이 사면 정치로 전락
독일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트부르흐는 “사면(赦免)은 기적(奇跡)이어야 한다”고 했다. 애초 사면권이 억울한 사람 구제하자는 것이니 감동을 주되 예외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슨 때만 되면 하는 습관적인 것, 거래나 정치의 수단쯤으로 여길 뿐이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최악을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줬다.
트럼프의 임기 막판 사면은 가히 폭주에 가까웠다. 작년 11월 대선 이후에만 세 번에 걸쳐 측근, 전직 공화당 의원, 그리고 사돈까지 사면했다.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의 부친 찰스 쿠슈너는 자신의 탈세 수사에 협조한 매제(妹弟)를 매춘부로 하여금 모텔방으로 유혹한 뒤 성관계 장면을 촬영해 협박한 파렴치범이다. 한국에서 그런 사람 사면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4년 뒤 대선을 노리는 트럼프에게 사면은 정치일 뿐이다. 그가 사면한 전직 공화당 의원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가장 먼저 지지해줬던 이들이다. 지지층을 위한 노골적인 봐주기 사면, 보은(報恩) 사면이었다. 이전 미 대통령들도 임기 막판 악성 사면을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트럼프의 사면은) 속속들이 썩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가. 군사정권 이후 최악 사면은 2007년 12월 말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막판 사면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측근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인사를 대거 사면했다. 노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 ‘병풍(兵風) 사건’의 주역 김대업씨를 사면하려다 법무부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가장 노골적인 사면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분명 그때보다 절제하고 있다. 하지만 사면 정치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취임 후 네 차례 사면에서 정권 지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시위, 제주 해군 기지와 사드 반대 폭력 시위 관련자들을 빼놓지 않았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새해 벽두에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문제를 제기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이 대표는 부인했지만 이런 사안을 청와대와 교감 없이 추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전직 대통령 사면은 찬반이 갈릴 수 있지만 사면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다. 진정 국민 통합을 위해서였다면 조용히 사면하고, 나중에 국민에게 그 이유를 밝히고 이해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미국 포드 대통령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전임 닉슨 대통령을 1974년 사면하면서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결정과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다.
그런데 이 정권은 느닷없이 사면론을 띄워놓고는 여권 내부와 친문(親文) 지지층이 거세게 반발하자 “국민 공감대와 당사자들 반성이 중요하다”며 슬쩍 발을 뺐다. 사면으로 중도층 끌어들이려고 여론 눈치를 보다 눈앞의 지지층 반발에 거둬들인 것이다. 결국 진정성 없는 사면 정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여권이 사면 전제로 ‘당사자의 반성’을 들고나온 것도 자가당착이다. 여권이나 진보 진영 인사들이 사면을 원하는 한명숙 전 총리나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에게 먼저 반성하라고 한 적이 있나. 두 사람도 자신들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나 내란 선동 사건에 대해 반성한 적 없다. 현 정권이 불법 시위자들을 사면하면서 반성문 받았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사면은 어떤 형태든 법 질서를 해치는 것이다. 그걸 그나마 상쇄할 수 있는 게 명분이다. 하지만 이번 전직 대통령 사면론은 정치적 계산만 하느라 명분을 잃었다. 또 설령 사면한다고 해도 이젠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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