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3000억과 바꾼 해운의 미래

김강한 기자 2021. 1.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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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하반기부터 국내 기업들은 수출품을 실어나를 배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소비 심리 위축으로 지난해 상반기 급감했던 물동량이 경기 회복과 함께 하반기로 몰리면서 선박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 운임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말 국내 유일의 대형 선사인 HMM(옛 현대상선)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까지 결의해 국내 산업계는 연초 수출 마비 직전까지 내몰렸다. 임협은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비슷한 상황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예전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에 있던 모형 컨테이너 선박./이진한 기자

업계 관계자들은 “한진해운이 지금도 있었다면 해운 물류 대란도, HMM에만 의존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진해운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해운왕을 꿈꾸며 1977년 설립한 회사다. 고속 성장하던 이 업체가 위기에 부딪힌 건 2008년부터다. 당시 경영진은 해운 호황에 대비한다며 고가에 배를 빌리는 위험한 계약을 맺었는데 2008년 금융위기 발발로 불황이 닥친 것이다. 수입이 급감한 한진해운이 선박 이용 대금(용선료)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만 연간 1조원에 달했다.

궁지에 몰린 경영진은 한진가(家)의 맏형인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조 회장은 사재 400억원을 출연하고 백방으로 뛰며 자구안을 마련했다. 용선료를 인하하기 위해 해외 선주들까지 직접 만나 협상했다. 채권단이 7000억원 규모의 자구안 제출을 요구하자 어렵게 마련한 5600억원 규모의 자구안을 제시하며 3000억원만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진해운 경영권 포기 각서도 제출했다. 해운업 관계자는 “조 회장은 국내 기업의 수출길이 사라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한진해운 파산을 결정했다. 150여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70여개 정기 항로를 운영하며 연간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던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를 없앤 것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운사 파산이었다. 득을 본 건 해외 선사들이었다. 이들은 한진해운이 보유했던 선박과 해외 터미널을 집어삼켰다. 또 한진해운의 운송 물량을 나눠 먹으면서 점유율을 높여 한국과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한국의 운송서비스 수출 비중은 2010년 세계 5위에서 지난해 11위로 추락했다. 한국은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선박에 의존하는 나라다. 해운은 기간산업 중에서도 핵심이다. 그러나 산은이 3000억원을 아끼는 바람에 한진해운이 수십 년간 개설한 정기 항로는 공중분해됐고 각국 화주들은 외국 선사로 모두 옮겨탔다. 한진해운의 빈자리를 절감한 정부가 2018년부터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미 사라진 해운 강국의 명성과 점유율을 회복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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