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국회사무처 어느 공무원의 충정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2021. 1. 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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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입시에 내몰린 시절이 있었다. 오갈 데 없어 더러 일요일에도 가던 고등학교. 부산 서면 근처 시외버스정류장을 지나칠 때면 공부고 뭐고 다 접고 구포 넘어 그 어디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에 발등이 마구 들썩거렸다. 돌아올 차비가 없는 빈 호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나중에 우리나라 모든 읍(邑)에서 하룻밤을 자리라! 퍽 돌발적인 결심을 했더랬다. 어느새 시시한 어른이 되었지만 까맣게 잊었다가 꽃산행을 다니면서 낯선 고장의 이름들이 새삼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흩어진 산을 섭렵할 때 충청의 배꼽 같은 곳을 찾는 날도 있었다.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문경(聞慶). 그 근처의 주흘산 부봉(釜峰)을 오를 땐 부산(釜山) 생각을 많이 했다. 과연 부봉도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상이었다. 햇빛 좇아 피는 꽃이 산에만 있는 건 아니다. 등포풀은 영등포에서 처음 발견되어 저 이름을 갖게 된 멸종위기종이다. 그 풀을 100년 만에 한강 밤섬에서 찾았다는 뉴스를 들었을 땐 여의도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여의도는 ‘너의 섬’이라는 기발한 해석이 있긴 하지만 여의는 汝矣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너다’라는 뜻의 단호한 한 문장이다.

속초 근처를 수색하는 날이었다. 속초는 束草다. ‘풀잎을 묶는다’는 이 우아한 이름을 보라. ‘동심초’를 흥얼거리며 해안을 둘러보니 의외로 귀한 꽃들이 많았다. 제비붓꽃, 조름나물, 각시수련 등을 관찰하고 나오는 길. 갈 땐 못 본 이정표가 퍼뜩 차창에 스치었다. 아야진 해변이었다. 아야는 강원도답게 我也다. 비명이 아니라 ‘나다’라는 뜻이니 ‘여의’와 퍽 대비된다. 마침 그 옆에는 국회수련원 안내판도 있었다.

그 말을 그 말로 대접하지 않는 시대는 불행하다. ‘여의/아야’에서 ‘네 탓이야/내 탓이오’로 곧장 미끄러지는 건 내 삐딱한 사심의 작용일까. 희미하게 짐작해 보느니, 네 탓임을 주장하는 데 선수라는 이들이 우글거린다는 기관에서 수련원이라도 아야진 근처에 자리 잡은 건 저런 사정을 중화하려는 국회사무처 어느 입법공무원의 갸륵한 충정?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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