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퇴근, 그후.. 저녁이 있는 삶 대신 '알바가 있는 삶' 됐다

이성훈 기자 2021. 1. 1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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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 신음하는 中企] [下] 더 악화된 삶의 질

대구 성서공단의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김모(41)씨는 지난 4일부터 동네 편의점에서 평일 주3회,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평일 사흘은 오후 8시부터 4시간씩, 토·일요일엔 오후 4~10시에 일하고, 시급 8720원을 받는다. 김씨는 “10살·7살 두 딸과 온전히 보낼 수 있었던 일요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가 다니던 공장이 올해부터 주 52시간제를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다.

주 52시간제는 중소기업과 그 직원에게 ‘비용 증가’ ‘임금 하락’이라는 충격파를 던졌다. 기업들은 수익성 하락으로 한계 상황에 내몰리고, 근로자들은 ‘야간 알바’ ‘주말 알바’에 나서는 실정이다. /뉴시스

김씨는 지난달까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7시 퇴근(주간 근무)하고, 토요일 10시간 정도 특근을 했다. 그렇게 월급 337만8000원을 받았다. 이달부터는 오전 8시 출근해서 오후 6시 퇴근한다. 주말 특근은 없다. 지금대로면 1월 월급 명세서엔 203만원이 찍혀 나올 것이다. 알바를 포함해 일주일 평균 일하는 시간(점심·휴식 제외)은 8.5시간 늘었는데, 월급은 오히려 44만원 감소했다. 평일 저녁과 주말을 포기하고 알바를 해도 이전 수입에 못미친다. 김씨는 “큰딸 수학 과외를 끊었다. 평일 공장에서 이른 퇴근이 전혀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연간(2019년 기준) 근로시간은 1957시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에 속한다. ‘과로 사회’의 오명을 벗기 위해 2018년 7월 주 52시간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률적인 주 52시간제는 중소기업과 그 직원에게 ‘비용 증가’ ‘임금 하락’이라는 충격파를 던졌다. 기업들은 수익성 하락으로 한계 상황에 내몰리고, 근로자들은 ‘야간 알바’ ‘주말 알바’에 나서는 실정이다.

◇'저녁 있는 삶' 아닌 ‘알바가 있는 삶’

대구의 한 제조 공장에 다니는 최모씨는 요즘 오토바이를 사기 위해 중고 사이트를 뒤지고 있다. 최씨도 주 52시간제로 주말 특근이 없어지자, 주말에 배달 알바를 뛰기 위해서다. 그는 “딸 유치원비라도 벌려고 한다”고 했다. 최씨가 가입돼 있는 지역 커뮤니티에는 올해 들어 주말이나 저녁 배달 알바 자리를 구한다는 글이 계속 올라온다.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반월산단 거리를 한 근로자가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다. 최근 반월산단에서는 매물로 나오는 공장이 늘고 있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코로나 여파에다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제조업은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물류업은 호황이라, 작은 공장 매물은 대부분 물류 창고용으로 팔린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최근 코로나로 호황을 맞은 배달업은 주 52시간제로 수입이 줄어든 중소기업 직장인들의 주요 ‘투잡’이 됐다. 편의점 GS25는 지난해 8월부터 근거리 도보 배달을 시작했다. 일반인이 배달원이 돼 건당 3000원 안팎을 받고 걸어서 20~30분 만에 배달해주는 것이다. 당초 용돈 벌이 하는 주부나 노인층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참여한 5만여 명 중 남성이 70%, 30~40대가 63%에 이른다. GS25 관계자는 “주 52시간제로 퇴근이 빨라지면서, 저녁에 이런 소소한 배달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배달 대행 전문업체 ‘바로고’에는 지난달 신규 배달원 가입자 수가 전년 대비 136% 늘었다. 한 배달대행 업계 관계자는 “경기 침체로 인해 타격이 큰 제조업이 집중된 공단 인근 지역에서는 배달대행 일을 겸업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며 “신규 배달원 등록 관련된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도 삶의 질도 대·중소기업 양극화

주 52시간제는 수입과 삶의 질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주 52시간제 이후 상대적으로 근무 여건이 좋은 대기업 직원들은 퇴근 후 여가 활동을 즐긴다. 4대 그룹 IT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이모(36)씨는 “오후 6시만 되면 PC가 자동으로 꺼져 칼퇴근을 하는데, 노조 요구로 임금 등 처우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며 “주52시간제에 직원들은 대체로 만족한다” 말했다.

대구 섬유 공장 직원 김씨의 주 52시간제 전후 생활

중소기업의 상황은 다르다. 서울의 한 중소 홍보업체에 다니는 김모(44)씨는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끼리 요즘 평일 저녁 온라인으로 게임이나 독서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 마냥 부럽다. 자신은 격일로 퇴근 후 그래픽 디자인 알바를 하고 있다. 김씨는 “예전엔 다 같이 야근하고 함께 모여 직장 상사 험담을 하고 했는데, 최근엔 나만 소외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수입도 차이가 난다. 주 52시간제 시행을 앞두고 2018년 국회예산정책처가 대·중소기업 임금 전망치를 분석해 보니 주 52시간제에 따른 임금 감소율은 300인 이상 대기업 7.9%, 300인 미만 중소기업 12.5%로 추산됐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대기업은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임금보전을 했지만 중소기업은 현재 코로나 여파로 최저임금 맞춰주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며 “주 52시간제 때문에 중소기업과 대기업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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