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언론 불신의 뿌리를 찾아서 / 이재성

이재성 2021. 1.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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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재성 ㅣ 문화부장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허쉬>와 <날아라 개천용>은 자못 징후적이다. 두 드라마 모두 기자가 주인공인데, 기자 스스로 자신을 ‘기레기’라고 비하한다. 기자 사회의 금기어에 해당하는 멸칭을 보통명사처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드라마가 동시에 두 편이나 나타난 건 언론에 대한 불신의 저변이 생각보다 깊고 넓다는 신호 아닐까. 미디어를 담당하는 부서의 데스크로서 이 불신의 원인을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해법을 논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기레기 담론이 처음 폭발했던 세월호 사건으로 돌아가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까. 당시 시민들은 학생들을 구하는 데 책임을 다하지 않은 박근혜 정부에 분노했고, 정부의 실책을 은폐하고 감싸는 언론에 분개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정부로 향하는 분노를 유병언 일가로 쏠리게 했다. 이어서 ‘십상시 문건’이 폭로되자 문건의 내용과 실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유출자 색출과 처벌로 돌렸다. 검찰과 조선일보의 협업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악행을 아무리 떠들어도 조선일보는 변하지 않았다. 안티조선운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훨씬 더 지나면서 시민들은 지쳐갔고, 진보언론을 향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타격을 통해 진보언론을 바꿔보자고 나선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기레기 담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에 대한 반감이 진보언론 안에서 생긴 것은 당연한 결과다. 거친 욕설과 비논리적인 주장은 이들이 과연 진보적 시민인지 의심하게 했다. 정권이 바뀌자 진보언론이라는 호명조차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 결과, 진보언론은 지금 ‘역진영논리’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좌충(左衝)은 너무 많고, 우돌(右突)은 너무 적다는 비판이 나온다.

흔히들 한국 언론의 문제가 정파성에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본질을 회피하는 그릇된 주장이다. 모든 사회는 재화의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를 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정치의 수단은 정당이므로, 갈등을 보도하는 언론사 또한 이념이나 가치 지향에서 특정 정당들과 병행하는 정파성을 띠게 된다. 언론의 정파성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며, 객관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이 오히려 예외적인데 최근에는 미국 역시 유럽을 닮아가고 있다.(조항제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언론의 공정성>) 무엇을 취재할지부터 기자의 주관이 작용하고, 언론사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기사화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는 점에서 미국 언론의 객관성(또는 중립성)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언론의 정파성을 인정하되, (관점의 다양화 등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 언론학계의 최근 합의다.

정파성 인정이 거대 양당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의제에 따라 적극적인 가치 판단을 하되, 결과적으로 특정 정당의 정책 방향과 같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자기검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정파성을 당파성 또는 계급성으로 바꿔 부르면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해 “시이오(CEO) 징역 살게 하는 중대재해법”이라고 보도할 때, 조선일보는 자신이 속한 정파와 계급이 어디인지 밝히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 신뢰 수준의 바닥을 낮춘다는 비판은 정파성 자체가 아니라 정파적 목적의 사실 왜곡과 거짓 선동으로 향해야 한다. 한국이 4년째 전세계 꼴찌를 기록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조선일보>는 2019년에 이어 2020년에도 한국의 조사 대상 14개 매체 가운데 14위였다. 2018년의 꼴찌는 <티브이조선>이었다. 이런 매체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꾸로 선 현실이 언론 불신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말해준다.

이 짧은 글에서 해법까지 내놓는다는 건 애초부터 만용이었는지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기레기 담론의 건너편에 진실을 추구할 의무가 있으며, 그 시작은 거짓을 거짓이라고 지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실패한 기레기 담론의 출구가 여기 있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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