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도 공포도 虛로 돌린 '물방울 화가'.. 제주에 잠들다

제주행플특별취재팀 2021. 1. 1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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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화가, 제주도에 잠들다. 물방울 이미지를 형상화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김창열 화가가 자신의 작품앞에 서 있다. 생전의 그는 오랜 프랑스 생활을 한 뒤 제주도의 풍광이 매우 흡사하다고 말해왔다. 그는 제주인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을 높이 평가하면서 작품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한국 추상 미술 거장 김창열(92) 화백이 5일 별세했다. 제주도에 자신의 작품 220점을 ‘의탁’할 정도로 제주도와의 인연을 중시여기던 그였다. 그 작품들로 제주도는 도립김창열미술관을 2016년 5월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에 열었다. 미술관은 제주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문화지구내에 있다.

개막식에 참석했던 김 화백은 “해외를 떠돌다 어디 정착할 곳을 찾는데, 제주도는 풍경이 프랑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또 도민이 미술과 문화를 사랑한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나는 맹산이라는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용케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도 않고 여기 산천이 수려한 제주도까지 당도했습니다. 상어한테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제주도에서 여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라는 축문을 남겼다.

김 화백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인 1945년 월남했다. 서양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운 뒤 1948년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했다. 이후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며 추상미술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다.

그가 물방울 화가라는 말을 듣게 된 단초는 미국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1972년의 일이다. 당시 파리시 근교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렸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캔버스천을 화구에서 떼다가 물을 뿌려놨다. 그 곳에 방울진 물이 아침 햇살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었다”고 했다. 같은 해 파리 ‘살롱 드 메’ 전시 출품작 ‘밤의 사건’으로 첫 선을 보이면서 그는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 화백이 제주도와 연을 맺은 것은 6.25때였다.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로 1년 6개월간 근무했다. 그는 제주도를 떠올리며 “추사 선생이 있었고 이중섭 화백을 여러 번 뵌 곳이 바로 제주도이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때의 감동이 계속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중섭 역시 6.25때 피난처로 서귀포에서 살았었다.

김 화백은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소원대로 그는 상어에 먹히지 않았고, 물방울을 통해 지향하는 대로 에고의 소멸을 찾았다. 그는 김창열미술관에 있는 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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