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리 "'시여 안녕'하고 돌아서려는데 당선.. 이름처럼 이겨냈더라고요"
■ 비등단 신인 최초 김수영문학상 받은 이기리 시인
“이번에 안됐으면 취업 할 생각
멈출 수 있는 것도 능력이야
글쓰기는 아주 이성적인 작업
막써놓고 우기는 작가 안될 것”
첫시집 ‘그 웃음을 나도…’ 펴내
상실과 상처 줄곧 슬픈 시와 달리
힙합과 농구 즐기는 27세 청년
“‘왕년에 나도 시 좀 썼지, 이제 안녕’하고 돌아서는 순간, 당선 전화를 받았어요. 돌아보니, 이겨냈더라고요. 제 이름처럼.”
제3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 이기리(27) 시인. 비등단 신인이 이 상을 받은 게 처음이라, 지난해 11월 수상자 발표 후 시단은 술렁였다. 혜성, 화제, 기적 같은 뻔한 문구를 떠올리는데, 훅하고 귀에 꽂힌 소감은 지극히 현실적. “이번에도 안 되면, 취업할 생각이었어요.” 막 출간된 수상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를 들고 이 시인이 웃는다. 이번 수상이 없었다면, 우린 시인 하나를 잃었겠지만, 그는 이 미소를 잃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든다. “포기가 삶을 새롭게 열어주기도 한다”며 당찬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에서 이 시인을 만났다.
아직 20대인 시인이 끈기, 도전, 열정이란 말 대신 왕년, 안녕, 포기를 이야기한다. 문학과 너무 빨리 이별하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으니, “멈추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처지나 현실을 무시하고 안 되는 걸 계속하는 거야말로 회피 아닌가”라며 반문한다. “그런 맹목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 있어요. 슬프잖아요, ‘나’를 그렇게 다루는 건….”
‘나’를 소중히 하는 건, 타인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런 신념은 이 시인의 시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상실과 상처로 시작해, 줄곧 아프고 슬픈 그의 시들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끼고, 잘 지켜낸 소년 화자가 산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을 끝까지 마주하고, 안녕을 고하고, 여전히 타인을 사랑하고 믿는 ‘나’를 끌어안는다. ‘이건 주는 게 아니란다/딱딱하고/깨졌고/더럽잖니/얼른 그것을/버려//아빠는 아이의 손을 내치고/해변을 빠져나간다’(‘가넷-탄생석’),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너, 너, 너/야유가 쏟아졌다//지우개에 맞았다’(‘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어느새 교실 문 너머 몰린 무리들이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고 있었다/보이지 않는 입꼬리들이 나를 천장까지 잡아당기는 기분/어때? 재밌지? 재밌지?’(‘구겨진 교실’), ‘손목을 심장 가까이 구부렸다가/아이들을 향해 원반을 던진다/긴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원반은 빛의 모서리들을 껴안고/아프지 않은 모양이 된다’(‘충분한 안녕’), ‘나를 맘껏 부려먹기를,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다면’(‘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 한 편의 성장영화를 보는 듯, 차곡차곡 장면들이 쌓인다.
시적 화자를 감도는 슬픈 기운은, 시인의 내밀한 경험들과 관계가 있지만, 실제로 이 시인은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라고 했다. 아니, 의지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나’를 아끼는 태도는 이렇게 시 밖에서도 작동한다. 이 시인은 합기도와 축구, 농구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 꾸준히 피트니스 센터에도 다닌다. “김수영 시인이 시는 온몸으로 쓰는 거라고 했잖아요. 장시간 앉아서 글을 쓰면, 정말로 물리적 고통이 따라오기도 하고…. 취미로 키우기 시작한 근육인데, 음… 잘 맞는 것 같아요, 하하.” 시는 해가 쨍하게 떴을 때, 밝은 창가에 앉아 쓴다. 밤에 찾아온다는 감성보다, 낮에 오래 머무는 이성을 신뢰한다. “글에 구조와 질서, 논리가 있어야 독자들을 잘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막 써놓고 우기는, 그런 양심 없는 작가는 되지 않으려 해요.”
중학교 1학년 때 시를 쓰기로 결심한 후, 장래희망 1, 2, 3순위가 늘 작가였다. 이 시인이 지향하는 시 세계는 정호승 시인이 쓴 ‘너에게’의 첫 문장.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는 그 말이 좋았어요. 어린 마음에 ‘아, 난 정말 이런 글을 쓰고 싶어’라는 결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요.”
그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한 2020년에 문학상을 받아서 조금 더 특별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것은 2020년 이후를 살아갈 모든 시인이 감지하는 어떤 숙명, 역할과도 닿아 있다. “엄청난 상실의 시대를 지나면서 슬픔에 대한 애도, 윤리적 성찰 등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저 역시, 빈자리, 구겨진 자리를 더 잘 보고, 더 많이 보듬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곤 합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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