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은 우아하게 하라

이성민 2021. 1. 11. 06: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재일교포 유미리 작가
[이성민의 톡팁스-88]

◆반박은 상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다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2020년 11월 18일, 재일동포 소설가 유미리가 제71회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에서 수상했다. 수상작은 '우에노역 공원 출구(Tokyo Ueno Station)'. 우에노역 공원에서 죽은 노숙자의 혼을 통해서 일본 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코로나19로 사회 분위기가 침체된 일본은 미국발 낭보에 희색하며 2018년 수상자인 독일계 일본인 마거릿 미즈타니에 이어 '일본 역대 두 번째 수상'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유미리는 세계적 작가로 순식간에 부상했다. 한 달 뒤인 12월 23일, 일본 기자클럽은 유미리의 전미도서상 수상기념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1988년 21세 나이에 희곡 '물속의 친구에게'로 데뷔한 유미리는 이즈미교카 문학상(1996년), 아쿠타가와상(1997년)을 수상한 중견 작가.

"전미도서상 수상 소개에서 '일본인으로 두 번째'라든지 '일본 문학에서 두 번째' 등 일본 작가라는 식으로 보도되는데,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 기자클럽이 마련한 자리에서 유미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미리 발언은 기자회견장에 폭탄을 던진 모양새였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일본 기자들은 유미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반박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본어로 읽고 쓰기를 하고, 물론 일본어로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적은 한국, 대한민국입니다. 때문에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자신의 첫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1994년)가 작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묻는 질문에 나온 것이었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을 다뤄 사생활 침해를 일으켰다며 8년 재판 끝에 출판 금지라는 초유의 판결을 받았다.

"그 소설은 내 첫 작품이었습니다. 소송으로 소설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받은 영향은 '항상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왔습니다. 작품을 쓸 때 항상 이것을 묻는 것은 정말 큰 영향입니다."

유미리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일본 인터넷 포털에 실린 유미리의 언어는 일본어. 하지만 유미리의 국적은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다. 요코하마공립학원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작품 활동을 개시할 때부터 유미리의 국적은 한결같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에 이어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2017년)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 3명을 배출했다고 자부하는 일본. 유미리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마련했던 자리였다.

◆반박은 우아하게 하라

"또 하나 제게 큰 영향을 끼친 일은 아쿠타가와상을 받았을 때 우익을 자처하는 남성이 수상기념 사인회가 예정된 서점 7곳에 협박 전화를 해서 사인회가 중지된 일입니다. 그 협박 이유는 (제가) 재일한국인, 즉 자이니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미리의 말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외압을 어떻게 문학화했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유미리는 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이 기대했던 대답과는 너무 다른 말을 했던 것이다. 일본 기자들은 미국 최고 권위의 상을 받는 영광의 순간에 자신을 일본인인 것처럼 보도하려 했지만 유미리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재일동포, 한국인이란 이유로 공격받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그것이 제 속성입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당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계속 자문하게 합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일본 기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다들 속으로 유미리의 눈치 없음을 흉보며 '멍석을 깔아줬더니 오히려 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미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하게 말했다. 유미리의 대답에는 한국인으로 꿋꿋이 버텨낸 인생이 담겨 있었다.

◆이성민 박사의 톡팁스(말의 요령): 반박은 우아하게 하라

일본엔 '이이토코토리(いいとことり)'라는 문화가 있다. '좋은 것은 내 것으로 취한다'는 뜻인데, 유미리의 기자회견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일본 국위를 떨쳤으니 향후 일본이 유미리를 적당히 일본 작가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평생 자이니치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유미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유미리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기 일생에 영향을 끼친 일본 사회의 악덕을 격조 높게 지적했다. 유미리는 결코 감정을 내놓지 않았다.

유미리는 재일한국인에게 상징적인 존재다.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는 유미리는 그런 자리에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공정과 불평등을 견뎌온 유미리는 도저히 일본 기자들이 반박할 수 없게 대답했다.

참고로 일본은 유미리까지 일본 작가로 둔갑시키려 했지만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많다. 2019년 소설 부문 수상자 한국계 2세 수전 최('신뢰연습')와 2020년 시부문 수상자 최돈미('DMZ 콜로니')가 있기 때문이다.

"반박은 상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다. 반박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반박은 우아하게 하라."

[이성민 미래전략가·영문학/일문학 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