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그 대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나 / 조형근

한겨레 2021. 1. 1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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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형근 ㅣ 사회학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호헌조치로 나라가 들끓던 1987년 5월의 어느 날, 서울 남부지검 대기감방에 30여 명이 포승에 묶여 있었다. 왜 그러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복들이 들어왔다. 한 명이 까만 가죽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특별 제작인지 주먹 정권 위치에 네 개의 금속 징이 박혀 있었다. 휙휙 몇 번 주먹을 휘둘렀다. 다부진 몸놀림이었다.

그가 말했다. “거기부터 한 명씩 이리로.” 지목당한 이가 어기적어기적 가서 그 앞에 섰다. “죄목?” “○○입니다.” 퍽퍽퍽…. 주먹이 꽂히자 그는 바닥에 나동그라져서 비명조차 못 지르며 버둥댔다. 다른 제복들이 질질 끌고 갔다. “다음!” 얼굴이 파래진 이가 설설 기어갔다. “죄목?” “○○입니다.” 퍽퍽퍽…. 그도 나동그라져서 버둥대다 끌려갔다. “다음!” “○○입니다.” 마치 고장 난 비디오처럼 폭력이 반복 재생됐다. 사시나무처럼 떠는데 내 차례가 왔다. “집시입니다.” “집시?” “예.” “대학생?” “예….” “들어가!” 얼떨떨했다. “맞을래?” “아닙니다.” 냉큼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기뻤다. 기뻐서 비참했다. 내 뒤로 몇 명의 집회 및 시위법 위반 대학생들이 ‘사면’받고 있었다. 누구도 이 불법 폭력에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하지 못한 우리가 나빴을까. 아니, 때린 놈이 나빴다. 그래도 자괴감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폭력이 사람을 파괴하는 방법 중 하나다.

그가 대학생을 안 때린 이유는 모르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대학생은 특별했다. 조사받을 때도 그랬다. 노동절 시위였는데 정보가 샜는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줄줄이 잡혔다. 대부분 구속 쪽으로 결론이 나자 형사들끼리 장난을 쳤다. 담당 대학생의 학력고사 성적을 걸고 내기를 했다. 담임처럼 자기 학생 점수가 더 높다며 좋아했다. 날 맡은 형사는 내 점수를 한참 부풀리고선 1등이라며 자랑했다. 출세하면 잘 봐 달라고도 했다. 같이 잡힌 노동자들은 내기를 걸 입시점수가 없어서였는지 많이 맞았다. 나중에 우리 공범들은 의정부교도소에서 일주일 동안 순화교육을 받았다. 노동자들이 교육을 거부하면서 구호를 외치다가 맞으면서 끌려갔다. 학생들은 숨죽이고 있었다. “동지들, 같이 싸웁시다” 외치며 끌려가던 여성 노동자의 눈빛이 지금도 선하다.

한 번 더 ‘큰집’에 갔을 때는 집시가 아니라 국보(국가보안법 위반)였다. 조직도까지 털려서 많이 맞지는 않았지만, 밀실에서 여럿에게 맞으니 공포가 컸다. 나는 줄줄 불었다. 그 기억이 맺혀서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세가 오래갔다. 20일 정도 조사를 받으니 끔찍하게도 형사들이 ‘살가워졌다’. 군대 상담까지 해줬다. 너희 같은 애들이 나중에 정치도 하고 출세도 하더라며 잘 봐 달라는 말을 돌아가며 했다. 수사관들이 공유하는 매뉴얼 같았다.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대꾸했더니 자기들끼리 막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별로 출세를 못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 말대로 정말 출세를 했다. 힘 있는 자리에 많이도 갔다. 권력 잡아 좋은 일 한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4·19와 민청학련 세대가 기득권이 됐다며, 민중을 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민중이 되자던 세대였다. 목소리 높여 앞장서던 이들 중에 지금 강남 사는 분들이 많은 것도 같다. 자식들 입시 스펙도 만들어주고, 투자 정보도 교환하면서 서로 살갑게 사는 듯하다. 불법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

전직 법무부 장관의 임명을 둘러싸고 나라가 쪼개졌었다. 사안의 불법성 여부는 애초에 내 관심이 아니었다. 전부 합법이라도 나는 이상했다. 그 정도 집안에서 자식 스펙 만들고 금융투자도 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는 항변들 앞에서 내 마음도 쪼개졌다.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거냐는 부라림에 내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노동자들의 유가족들을 내보낸 다음 유예조항으로 얼룩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처리한 여당에 대해, 그만하면 애썼다는 변호들이 들려서 내 마음이 아득해졌다. “학삐리들…” 하며 끌려가던 그 여성 노동자의 눈빛이 내내 어른거렸다.

두 번째 구속 때 조사받던 시경 대공분실 밀실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여기가 욕조 있던 자리야. 종철이 때문에 없앴어” 하면서 형사는 물을 틀었다. 그때부터 나는 줄줄 불었다. 이번주에 그이의 기일이 돌아온다. 사는 게 부끄러워서 몇 년 전부터 추모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올해도 그럴 것 같아 마음이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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