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94세 英여왕의 백신 솔선수범

손진석 파리 특파원 2021. 1.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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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남편 필립공. /EPA 연합뉴스

94세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9일 코로나 예방 백신을 맞았다. 99세인 남편 필립공도 함께 맞았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빨리 접종하도록 어른으로서 과학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왕은 갓 30대에 접어든 1957년에도 비슷한 솔선수범에 나선 적 있다. 당시 8세이던 아들 찰스 왕세자와 6세 딸 앤 공주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맞혔다고 공개했다. 갓 개발된 소아마비 예방 백신을 둘러싸고 불신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미국에서 백신을 맞고도 소아마비에 걸린 사례가 나왔고, 영국에서는 접종 직후 사망한 어린이가 있었다. 그러자 여왕이 자녀에게 백신을 맞혔고, 세상의 많은 부모가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소아마비 퇴치에는 여왕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도 백신 개발로 종식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초반에는 국민의 마음가짐의 차이가 방역 성적을 갈랐다. 서방에 코로나 타격이 큰 이유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자유를 희생하려는 의사가 없었던 것이 결정적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자유를 억누르며 자발적으로 방역에 협조한 국민이 많았다. K방역이라는 건 국민이 이룬 성과이지 한국 정부의 실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마스크 쓰기와 같은 방역 수칙 준수는 버티기 수단일뿐 전염병을 몰아내는 마지막 열쇠는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K방역이라는 자화자찬의 풍악을 틀어놓고 세상의 흐름을 놓쳤다. 백신이라는 과학의 영역과 그걸 빨리 차지하려는 외교의 영역에서 실력 경쟁이 벌어지자 한국은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시범 경기 1위 팀이 정규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순위가 처진 양상이다. 저마다 자유를 희생한 국민들은 갑자기 국격이 가라앉는 광경을 목도했다.

백신을 손에 넣는 경쟁에서 밀린 한국의 집권 세력은 백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비겁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며칠 전 30대 여당 의원이 “국민을 마루타 삼으려는 것”이라는 표현을 소셜미디어에서 썼다. 문재인 정부가 백신을 빨리 확보했더라도 그가 ‘마루타’란 표현을 쓰며 폄훼했을까. 뒤늦게 미국의 모더나 최고경영자와 화상 통화를 하며 백신을 확보했다고 홍보한 문재인 대통령이 마루타 실험을 한다는 것인가.

소아마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듯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한 과정에는 공식이 있다. 백신이라는 과학의 결과물을 내놓고, 그것을 신뢰하는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뒤를 따랐다. 84세의 프란치스코 교황도 며칠 내로 코로나 예방 백신을 맞겠다고 했다. 교황은 “백신을 부정하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한국의 일부 집권 세력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계산한 뒤 과학을 무너뜨리려는 비이성적인 시도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낀다. 자칫하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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