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슬픈 이야기를 웃기게 쓰는 법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2021. 1.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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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극적인 순간’. 내가 학교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의 제목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첫째,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을 떠올린다. 둘째, 그 슬픈 이야기를 어떻게든 웃긴 이야기로 바꿔서 써낸다. 셋째, 분량은 A4 한 장을 넘지 않는다.

처음 이 규칙을 접한 학생들은 당황한다. 슬픈 이야기가 어떻게 웃긴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어떻게 A4 한 장에 써낼 수 있는가. 영감을 주기 위해서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주로 아버지와의 일화다.

/일러스트=김하경

“제가 중학생 때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한밤중에 술 취해 집에 들어오셨어요.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서 저 자식을 때려야겠다고 중얼거리셨어요. 난 언제 맞을지 모르니 이불 속에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들어오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십분만 있다가 때려야지. 열두시가 되면 때려야지. 화장실만 다녀와서 때려야지를 연거푸 중얼거리셨어요. 동이 트기 직전, 아버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방으로 들어오셨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보는 느낌이 났어요. 아마 어디를 때려야 할지 고민 중인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결심하신 듯 갑자기 제 발을 두 손으로 집으셨어요. 아 발을 때리시는구나. 나는 모든 에너지를 발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또 발을 집어든 채 말이 없으셨어요. 그러다 불쑥, 아 이 자식이, 발이 왜 이렇게 평발이야? 누굴 닮아서 평발이야? 이게 고칠 수가 있는 평발이야? 아버지는 그렇게 갑자기 평발에 대한 깊은 고찰을 시작하시면서 제 발을 간지럽히기 시작하셨죠. 저를 때리지 않을 좋은 연구 과제를 찾아낸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났어요.”

학생들은 늘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신나게 웃는다. 실컷 웃고 나서 말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있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제 발을 간지럽히다가, 갑자기 발을 껴안고 우셨어요. 저는 사정상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고, 집에 전기가 끊긴 지 오래돼서 밤마다 촛불을 켜놓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제 방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촛불을 들여다보고 계셨던 거예요. 그 촛불이 미안해서 우셨던 거예요. 하지만 저의 이야기는 늘 간지럼에서 멈춰요. 간지럼을 떠올리면 촛불을 견딜 수가 있거든요. 여러분도 글쓰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촛불을 간지럽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말없이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을 담담히 바라본다. 자신만이 겪었던 슬픔을, 자신만의 유머가 담긴 이야기로 상상해나가는 눈빛은 아름다운 에너지로 빛난다.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슬픔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나가듯,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나가는 모습. 펜을 쓱싹거리는 소리 사이사이 들리는 쿡쿡거리는 웃음. 그동안 한 번도 웃지 못했던 슬픔이란 친구를 마음껏 간지럼 태우는 소리.

마침내 모든 소리가 멈추고, 한 장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하나의 슬픔을 견딜 수 있는 한 장의 이야기. 아마 이들은 또 하나의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해가 점점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 지난해의 삶을 다 살지 않았는데 재빨리 새로운 해의 삶을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세상이 바라는 삶을 새롭게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내가 살아왔던 삶은 지난해의 어딘가에 슬프게 머물러있을지도 모른다. 상상해본다. 새해가 오면, 새로운 계획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묻어둔 슬픔도 하나씩 떠올리고, 그 슬픔을 유쾌하게 간지럽혀서, 실컷 웃으며 떠나보내는 장면을.

수업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여러분, 슬플 때마다 떠올리세요. 여러분은 참 웃긴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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