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법안' 통과시켜 놓고 '자성론'..거대 여당의 무책임

김형규 기자 입력 2021. 1. 10. 20:44 수정 2021. 1. 1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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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민주당에 남긴 것

[경향신문]

노회찬 묘소 찾은 정의당 김종철 대표(앞줄 왼쪽에서 네번째)를 비롯한 정의당 지도부가 10일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노회찬 의원 묘소에서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을 들고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등 후퇴한 내용에 이름(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마저 바뀐 ‘누더기’로 국회를 통과한 뒤 더불어민주당에선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자평과 함께 법안 후퇴에 대한 유감 표명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법안 처리의 절대 권한을 쥔 174석의 집권여당이 스스로 주도한 법안을 두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에선 중대재해법 국면을 통해 그간 진보·개혁을 내세웠던 민주당의 이율배반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난 8일 중대재해법 본회의 처리 뒤 민주당에선 ‘자성론’이 쏟아졌다. 이탄희 의원은 “법의 제정 자체는 환영하지만 수정된 내용은 유감”이라며 벌금형 하한선 삭제 등 법안 후퇴 내용을 지적했다. 박주민 의원도 “제가 발의한 법안 취지를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다”며 “전체적으로 많이 아쉽다”고 밝혔다.

“의미 있는 진전”자평과 함께 “후퇴 법안 유감” 동시에
당 안팎에서 “진보·개혁 정체성 퇴색, 이율배반” 비판

하지만 압도적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 이미 통과된 법을 놓고 뒤늦은 ‘고해성사’를 하는 건 자기모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은 중대재해법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와 법안심사소위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갖고 있다. 얼마든지 원안을 관철할 수 있었는데도 정부안보다 후퇴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정부·여당의 주요 개혁과제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은 단독 처리하면서 민생 법안인 중대재해법은 유독 ‘야당과 합의 처리’를 강조하는 이중성도 지적된다.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며 29일간 단식농성을 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앞서 ‘야당 탓’을 하는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여태까지 여당이 많은 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는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하느냐”고 힐난하기도 했다.

애초 중대재해법을 당론으로 추진하지 않고 상임위 논의에 맡긴 것부터 당 지도부가 의지 부족을 드러낸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 지도부 중 중대재해법 후퇴에 사과한 것은 노동계 출신인 박홍배 최고위원이 유일하다.

당 안팎에선 민주당의 개혁 정체성이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강민정 열린민주당 의원은 지난 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국회는 극소수 경영자들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대다수 국민을 대표해야 한다”며 “왜 자신에게 주어진 입법권을 이렇게 쓰는가”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10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총선 후 180석의 거대 정당으로 거듭나면서 당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다소 보수화된 건 사실”이라면서도 “애초 민주당은 ‘캐치올 정당’(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국민정당)이지 특정한 이념을 좇는 진보정당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9일 SNS에 정의당이 반대한 중대재해법에 대해 “이 법의 원형은 고 노회찬 의원이 2017년 대표발의한 법”이라며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밝혀 논란을 불렀다. 법 적용 대상과 처벌 수위 등 노 전 의원의 발의안에서 핵심 내용이 대거 빠진 법안을 두고 마치 그의 유지를 이은 개혁 성과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지금 법에는 노회찬 정신이 오롯이 담기지 못했다”며 “노동자의 죽음을 막으려 했던 노회찬의 정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꼬집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는 이날 지도부와 함께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의 노회찬 의원 묘소를 찾아 “노회찬 정신이 빠진 법을 들고와 대단히 죄송하다. 중대재해에 대한 차별을 막는 법안을 반드시 만들어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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