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엔 "합의 이행하는 만큼 상대"..주도권 잡겠다는 뜻
[경향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내놓은 대남 메시지는 ‘남측의 합의 이행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을 검토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남측의 태도에 따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로 평화 무드가 조성됐던 ‘3년 전 봄날’이 재연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기면서도,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을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남측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건을 내걸고 남북관계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미로 해석돼 새해 남북관계 돌파구 마련 전망이 불투명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지난 5~7일 진행된 당 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현 남북관계를 사실상 “(2018년 4월)판문점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아간” ‘파국’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적대행위 중단·남북선언 이행을 해결이 시급한 ‘근본 문제’로 꼽고, 정부의 방역협력·인도협력·개별관광 제안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평가절하했다. 금강산 관광지구 독자개발 방침도 확인했다.
‘3년 전 봄날’ 언급으로 남북관계 조건부 개선 여지 남겨
3월 한·미훈련이 첫 고비…11일 문 대통령 신년사 관심
김 위원장은 특히 “(남조선 당국은) 첨단군사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해야 한다는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를 계속 외면하면서 조선반도의 평화와 군사적 안정을 보장할 데 대한 북남합의 이행에 역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 연합훈련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단을 남북관계 개선 여부를 가늠할 선결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에 오는 3월 한·미 연합훈련이 첫 번째 고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합훈련이 예정대로 실시되면 북한이 이를 빌미로 무력 시위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코로나19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는 대로 한·미 연합훈련 실시 문제를 긴밀히 협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을 ‘최대 주적’으로 일컫고 핵무력 고도화를 노골적으로 선언한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북·미 협상 재개를 고려해 연합훈련을 조정할 여지가 좁혀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한 외교소식통은 “대북정책 물밑 검토작업을 하고 있는 바이든 정부를 향해 북한이 요구사항을 당 대회 형식으로 미리 공표한 셈”이라며 “미국이 유연성을 발휘할 공간이 줄어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로서도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세계 최대 수준의 탄두 중량을 갖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는 발언 등을 인용해 남측의 전력증강계획을 문제 삼은 것은 수용하기 쉽지 않은 요구다.
8차 당 대회에서 북한이 대남 유화 메시지를 발신하기를 내심 기대해온 통일부는 김 위원장이 ‘3년 전 봄날’을 언급하며 대화 여지를 남긴 것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통일부는 지난 9일 “남북 합의를 이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며, 남북이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번영의 새 출발점을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조건부’ 관계 개선 의지를 내비치면서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의를 보여줄 필요 없다” “남북합의를 이행하는 만큼 상대해줘야 한다”고 한 것은 결국 북한이 남북관계 ‘주도권’을 쥐고 가겠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그간 인도적 협력을 시작으로 경색된 남북관계 개선 물꼬를 트겠다는 구상을 그려 왔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장애물부터 걷어내고 달리자고 하고, 우리는 장애물을 피해서라도 달리자는 것이라서 간극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신년사에서 남북관계와 관련, 어떤 언급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신년합동인사회에서 “여건이 허용된다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마지막까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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