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스러운데 심오한..백남준의 사유를 엿보다

노형석 2021. 1. 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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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거장 백남준이 고려가요에서 유래한 가곡 '청산별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한다.

전시에서는 안혜령 화랑 대표가 소장해 온 작품과 개인 컬렉터에게 빌려 온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의 낯선 평면 회화와 판화 연작, 비디오 소품 2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사가나 기호학 전문가들이 주목한다면, 백남준이라는 거장의 깊고 넓은 내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통로가 생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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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갤러리에 차려진 개인전
리안갤러리 지하 전시장에 나란히 내걸린 석판화 연작 <진화, 혁명, 결의>의 두번째 작품 ‘마라’의 일부분. 로봇의 얼굴 부분 화면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조만식 같은 국내 해방 공간의 주요 정객들의 한자 이름과 ‘죽는다’ ‘바보’ 같은 문장·단어들을 뒤섞어 적었다. 이어서 단순한 선으로 사람 얼굴이 들어간 티브이 모니터와 뜻 모를 기호 같은 것들을 줄줄이 그려놓아 마치 암호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청산에 살으리랏다아~”

의자에 앉은 거장 백남준이 고려가요에서 유래한 가곡 ‘청산별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한다. 신나는 표정으로 노래하다가 갑자기 가사를 빼먹고 “다다다”를 외쳐댄다. 소리가 울리자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서 있던 서양 오페라 여가수가 요상한 괴성을 내면서 끼어든다. “워워워 워우워우워우 우우우웅 애애앵애애애앵 우히우히….” 백남준도 지지 않고 대거리하듯 소리를 낸다. “다다다다닷…다다다다다아아앙.” “앵앵앵…우히우히.”

둘의 목소리가 부딪히며 고조될 찰나 화면은 암전된다. 대신 둘의 소리에 맞춘 전파 이미지가 미친 듯 광선춤을 춘다. 그리고 곧이어 꿀렁거리는 바닷물이 등장하더니 한참 영상 속을 흘러간다. 백남준 미학의 골자는 조형적인 작품이 아니라 우리 감성과 생각의 덧없는 흐름을 포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지하 전시장 안쪽 벽에 내걸린 벽걸이 형태의 비디오 설치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 백남준이 고려가요 ‘청산별곡’을 직접 부르는 퍼포먼스 영상이 보인다. 모니터 둘레를 덮은 판에는 웃는 얼굴이 들어간 티브이 모니터 그림이 그려졌고, 큼지막하게 표기한 작가의 서명 ‘PAIK’도 보인다.

2000년 백남준이 뇌일혈로 왼손이 마비된 채 만든 <호랑이는 살아있다>라는 벽걸이 동영상 설치작업을 보면, 키득거리는 웃음을 멈출 수 없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심오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비장한 영상과 회화의 요지경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이 작품은 지금 서울 종로구 서촌(창성동) 골목에 자리한 리안갤러리 서울점에 차려진 백남준 개인전 지하층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에서는 안혜령 화랑 대표가 소장해 온 작품과 개인 컬렉터에게 빌려 온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의 낯선 평면 회화와 판화 연작, 비디오 소품 2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백남준’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비디오아트와는 다른, 작가의 내밀한 속내를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 상당수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는 새천년을 맞은 2000년, 한국인의 강인한 기상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백남준의 시공간적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독특한 구음 퍼포먼스 말고도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는 북한 다큐 필름, 작가가 단순한 선으로 휘갈긴 금강산 그림과 호랑이 얼굴 드로잉, 살풀이 굿판 등이 쉴 새 없이 바뀌며 흘러가는 ‘장면 전환 기법’이다. 영상 모니터 둘레에다 단순한 선묘로 사람 얼굴을 넣은 특유의 티브이 모니터 이미지도 그려졌다.

석판화 연작 <진화, 혁명, 결의>의 네번째 작품 ‘로베스피에르’. 18세기 프랑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를 상징하는 로봇 그림 양옆으로 ‘혁명은 폭력을 정당화하느냐?’란 문구를 써 넣었다.

익살스럽고 심오한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볼거리는 프랑스혁명을 다룬 석판화 연작이다. 198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혁명 200주년을 기념한 영상 조형물 작업을 의뢰받은 뒤 구상한 작품이다. 당대 혁명가 8명을 상징한 로봇 이미지 석판화 연작 8점이 나왔다. 로봇 그림마다 여러 나라말로 된 문장과 암호 같은 기호를 가득 적은 백남준의 필적이 작은 화면에 함께 들어가 있다. 혁명기 암살된 마라를 다룬 두번째 작품을 보면 로봇의 얼굴 부분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조만식 같은 국내 해방 공간의 주요 정객의 한자 이름과 ‘죽는다’ ‘바보’ 같은 문장·단어를 뒤섞어 적었다. 이어 사람 얼굴이 들어간 티브이 모니터와 뜻 모를 기호를 줄줄이 그려놓아 마치 한국과 프랑스의 혁명사가 얽힌 암호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프랑스 혁명가 조르주 당통을 다룬 석판화에는 “나는 자식을 하나도 안 만들었으나, 로보트는 100마리나 만들었다”는 다소 엉뚱한 술회를 털어놓으며 역사의 무상을 설파한다. 석판화 외에도 컬러텔레비전 초창기에 나왔던 화면 조정 화면을 캔버스에 재현한 뒤, 그 위에 김소월의 시구나 ‘가나다라’ 등 한글 자모를 적은 작품도 보이는데, 선승의 게송이나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어 등으로 적은 작품 속 문장과 기호를 탐구하는 ‘작가 도상학’의 지평이 열릴 수 있을까. 미술사가나 기호학 전문가들이 주목한다면, 백남준이라는 거장의 깊고 넓은 내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통로가 생길 듯하다. 3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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