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더 많은 포퓰리즘을 / 이세영

이세영 2021. 1. 1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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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이세영

정치팀장

“회의장 안에서는 질서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윤호중 법제사법위원장의 말은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그 잘 깎인 ‘톤 앤 매너’ 앞에서 “우리 말도 들어달라”는 산재 유가족 이용관의 절규는 ‘들려도 이해될 수 없는’ 소음에 가까웠다. 오랜 단식으로 서 있을 기력조차 없어 보이던 그가 방호원에게 밀려 회의장 문밖으로 내쳐질 때, 공적 의제를 논하는 고귀한 공간에는 비천한 무자격자에 할당된 자리가 애초부터 없었음이 분명해졌다.

지난주 미국과 한국의 의사당에서 하루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개의 ‘사태’는 포퓰리즘에 대한 오랜 양가감정을 불가피하게 재소환했다. 7일(한국시각)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연방의사당 난입이 ‘사려 깊은 공화제적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추앙받던 미국 민주주의마저 극단적 양극화와 팬덤 정치에 위협받고 있음을 드러냈다면, 이튿날 우리 국회는 ‘힘과 자격을 갖춘’ 이들의 요구만을 선택적으로 대의해온 민주주의의 ‘결손 지점’을 가감 없이 노출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출현 동력을 민주주의 자체의 속성과 한계에서 찾는 견해는 오래전부터 공감을 얻어왔다. 포퓰리즘을 ‘병리적 일탈’이 아닌, 민주주의가 상시적으로 동반하는 ‘그림자’로 보는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이 볼 때 포퓰리즘의 계기는 민주주의가 내장한 ‘분할과 배제’의 메커니즘에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민주정도 마찬가지여서, ‘공동의 일’을 다루는 정치의 공간은 ‘먹고사는 일’에 속박되지 않은 자유민 남성들의 몫이었다. 가사와 생계활동에 전념하는 여성과 노예는 당연히 배제됐다. 폴리스를 자유와 공공의 문제를 다루는 ‘순수 정치’의 영역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선, 사적 이해관계에 오염되기 쉬운 ‘먹고사는 문제’의 틈입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당대 엘리트의 지배 관념과 무관하지 않았다.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의 핵심 영역으로 진입한 오늘날에도 특정한 ‘문제’와 ‘집단’에 대한 체계적 배제가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노사관계나 노동조건의 변화와 결부된 사안들을 ‘정치’가 아닌 ‘사적 계약’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조치들이, 경쟁하는 정치세력 사이에서 큰 이견 없이 합의된 선례들이 잘 보여준다.

‘촛불정부’를 자처해온 지금의 집권세력도 예외는 아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과정을 복기해보면 어렵잖게 확인된다. 재계 반발이 큰 중대재해법 제정보다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을 손질하는 선에서 노동계와 유가족 요구를 무마하려 했다는 건, 애초 그들의 관심이 갈등의 ‘사회화’를 통한 정치적 해결보다 ‘사사화’를 통한 비정치적 봉합에 있었다는 뜻이다. 여론에 밀려 중대재해법 제정으로 방향을 선회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용 대상을 좁히고 시기를 늦추더니 처벌 수위마저 큰 폭으로 낮춰 법의 실효성을 스스로 축소시켰다. 항상 그렇듯 ‘기업활동 위축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더 당혹스러웠던 점은 법안이 통과된 뒤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공론장에서 보여준 모습이다. 누군가는 “이 정도로 통과된 것만도 어디냐”, 또 다른 누군가는 “노회찬이 하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법안 후퇴를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더 중요한 싸움을 위해 이쯤에서 물러서라”고 을러대는 이도 있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들이 ‘기득권 엘리트와 싸우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의 언어다. 하지만 이들의 말과 행동을 ‘목소리 없는 자들의 저항’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날것으로도 충분히 우렁찰 뿐 아니라, 진영주의 셀럽과 집권당 유력 정치인의 고출력 스피커에 수시로 증폭되면서 현실 정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 파동을 통해 드러난 한국 정치는 ‘그들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 포퓰리즘이 문제 삼을 우선적 이슈 역시 권력 배분이나 사법개혁처럼 고귀한 ‘순수 정치’ 영역이 아니라, 비루하고 천한 ‘먹고사는 일들’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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