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G 대한민국, 공무원만 아직 2G 갑옷"

김유태 2021. 1. 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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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정학회 첫 여성 학회장
박순애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철옹성 같은 남성위주 학회서
65년만에 여성 수장으로 선출
"영혼없는 공무원 형식주의가
국민 눈높이와 괴리 벌려..
완전히 새로운 국가 OS 필요"
한국행정학회는 1956년 설립됐다. 민간·시장·정부 간 관계를 규정짓는 규제와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학계 싱크탱크다. 지난 연말 이 학회에 이변이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여성 학회장을 선출한 것이다. 65년 만의 일이다.

신임 행정학회장 박순애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56·사진)는 "2G 시대의 무거운 갑옷을 껴입은 행정 현장을 바꾸겠다"며 출사표를 냈다. 왜일까. '레드 테이프(red tape)'와 '여성'을 키워드 삼아 최근 서울대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갓 부임했던 시기에 행정학 수업에서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맨 앞줄 학생이 '교수님 정말 몰라서 물어보세요? 권력을 가질 수 있잖아요'라고 하더라고요. 공무원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졌을 때가 있었지만 이제 온 국민이 전문가예요. 그만큼 공무원 역량을 불신합니다."

레드 테이프는 관료제 형식주의의 상징이다. 어원은 공무원 규제 서류를 묶은 '붉은 끈'이다. 미국은 규제 철폐를 약속하며 레드 테이프 커팅식까지 벌였다. 한국은 어떤가. 3년간 증원된 공무원이 9만명이란 뉴스가 들린다. 그런데도 행정 현장은 늘 변화에 뒤처진다. 멀리 가볼 것도 없다. 붉은 수돗물 사태, 정인이 사건만 봐도 보는 이는 갑갑해진다. "정부가 발 빠르게 사과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모습을 국민은 기대하죠. 그런데 공무원은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책무를 위배하지 않았다며 완강해져요. 사용자인 국민 눈높이와 공무원 소극행정 간 미스매치가 발생하면서 정부가 불신의 대상이 되는 사회예요."

박 교수는 최근 서울 소재 한 구청 요청으로 구(區)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깨끗한 거리 조성' 방법을 토론하는데 공무원들은 '철저한 감시'를 첫손에 꼽았다. "쓰레기 투기를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안 버리게 하거나 처리를 쉽게 해주는 거죠. 1990년대 후반 워싱턴DC의 한 길가에서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니 보이는 휴지통만 5개였어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면 무단투기 유인이 줄어듭니다. 교육 강화와 처리 유도는 제쳐 놓고 징벌과 과금부터 말해서는 안 되죠."

미 행정학자 톰프슨(D Thompson)을 박 교수는 자주 인용한다. 톰프슨이 구분한 '위계적 책임(상부 책임)'과 '집단적 책임(공동 책임)' 가운데 관료제는 후자를 선호한다. 공무원에게 규제는 안전한 가면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풍경은 한국과 유사해요. 목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실업급여를 받아야 하는데,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그에게 공무원은 온라인 신청이 규정이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행정 편의주의가 영화만의 일인가요. 국가에 맞는 운영체제(OS)부터 바꿔 끼워야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적 OS가 그의 관심사다. "가상화폐 근원에는 무(無)국가주의가 숨어 있어요. 국가 시스템이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코로나19는 탈국가주의를 가속화할 겁니다." 관료의 개인 책임성 확보가 답이라고 그는 본다.

고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화려한 외모와 달리 가재도구에 '빨간 딱지'가 붙을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간신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온 그는 지금 근무하고 있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몇 안 되는 비서울대 출신이다. 그 과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셋이에요. 첫째 딸 데리고 박사 학위 받으러 미국에 갔을 때 수업과 연구원 생활을 병행하며 애 키우는 일이 어디 쉬웠겠어요. 어린 딸을 야간수업에 데리고 가서 눈총을 받던 기억, 둘째 아이가 아파서 밤 꼬박 새우고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에 생중계 방송을 하러 갔던 날도 기억나요."

유리천장을 깬 그가 후배들의 유리천장을 깰 방도는 없을까 늘 고민 중이다. "유엔 산하 여성 관련 회의에 배석한 적이 있어요. 대만 대표가 여성할당제(30%)가 오히려 유리천장이라며 공공부문 여성 50% 채용 목표를 제안했어요. 진짜 꿈같은 얘기였죠. 이번에 취임하면서 행정학회 전체 임원 절반인 40명을 여성으로 임명했습니다. 평등한 룰을 지키는 사회를 학회가 선도하도록 만들어 볼게요."

[김유태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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