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e is Back! 건실한 지도자로 돌아온 '아트 덩커' 김효범

민준구 2021. 1. 10. 1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점프볼=민준구 기자] 화끈한 쇼맨십, 예술적이었던 덩크까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프로농구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효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KBL에 데뷔했던 그는 이제 지도자로서 새 삶을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미프로농구(NBA) 코치라는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 본 기사는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KBL에서만 13년, 새 꿈을 꾼 김효범
김효범은 미국 NAIA(전미체육대학간협회) 리그 소속 뱅가드 대학에서 활약한 이후 한국에서 선수 생활하는 것을 꿈꿨다. 2005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에 지명된 그는 무려 13년간 KBL에 몸담았다. 김효범에 대한 여러 편견, 그리고 기량에 대한 의심은 은퇴 전까지 꼬리표로 붙었다. 그러나 13년이란 세월을 KBL에서 보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한국으로 건너와 처음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점차 기량을 폭발시키며 KBL 간판스타로 부상했다. 모비스의 2008-2009시즌 정규리그 1위, 2009-2010시즌 통합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김효범 이름값은 올랐다. FA로 풀린 그는 5억 1,300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서울 SK에 이적하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후 전주 KCC에 잠시 몸담았고 2016-2017시즌 모비스에 다시 돌아온 뒤 시즌 종료 후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김효범의 통산 성적은 14시즌, 총 567경기 평균 8.8득점 1.8리바운드 1.1어시스트다.

사실 김효범은 모비스로 복귀하기 전부터 은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 13년이란 시간 동안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힘든 적도 많았다. 이제는 몸을 쓰는 일보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한국에 온 뒤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에는 내 뇌를 사실상 셧 다운(shut down)시켰다. 생각이 아닌 실행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해가 가기 전에 이미 몸을 움직여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상황이 찾아왔을 때 누군가가 이해를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정밀한 분석과 또 정보를 통해 타당한 이유를 전해줬으면 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동기가 생겨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몸을 써야 할 때 그 짐이 너무 무겁더라. 오랜 고민 끝에 선수로서의 역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김효범은 일찍부터 지도자에 대한 길을 걷기 위해 준비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는 “KCC에 있었을 때 척 퍼슨 코치한테 정말 많은 걸 배웠다. 그 당시 척 퍼슨 코치는 LA 레이커스 어시스턴트 코치를 마치고 한국에 온 상태였다. LA 레이커스하면 트라이앵글 오펜스 아닌가. 그 시스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배웠다. 전체적인 스페이싱이나 타이밍에 대한 부분은 내 자산이 됐다. 그때는 농구를 하는 시간보다 척 퍼슨 코치에게 배우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밤을 새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매 순간 매달려 있었다. 선수 때는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효범은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은퇴하지 못했다. KCC와 계약이 1년 남은 상황에서 유니폼을 벗으려고 하다가 자신의 은사인 유재학 감독의 부름을 받고 친정 모비스에 복귀했다. 그는 한 시즌을 더 치른 후 가벼운 마음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김효범은 “사실 유재학 감독님은 내가 지도자 준비를 하고 있는 걸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시즌을 마치고 난 뒤에 은퇴하겠다고 하니 놀라시더라. 사실 더 뛰려면 뛸 수도 있는 몸 상태였다. 연봉도 크게 낮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 한국농구의 미래와 만나다
김효범은 은퇴 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지는 있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과거 팀메이트였던 이대성에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은퇴 후에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마침 (이)대성이가 소중한 인연을 맺게 해줬다. 이승호, 박유진, 데니스 김 등 농구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불어 2017년 6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나이키와 함께하는 제4회 아시아 태평양 팀 캠프’에 참가할 한국 선수단의 인솔자가 됐다. 원래는 KBL 감독님들 중 한 분이 오시기로 했는데 불참하면서 대체자가 된 것이다.” 지도자를 꿈꾸던 김효범에게 이 캠프 대리 참가는 신의 한수로 다가왔다. 김효범은 당시 한국은 이현중, 여준석, 이두원, 차민석, 정희현, 김형준, 김도은, 김재원, 서문세찬, 박민채를 인솔해 중국에 갔다(메인 코치는 현재 덴버 너겟츠의 찰스 클래스크). 중국, 인도, 뉴질랜드, 호주가 참가한 대회에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또 호주와 결승에선 접전 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고, 그 중심에는 김효범이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뉴질랜드와 호주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만 가득했다. 중국과 인도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강한 뉴질랜드, 호주를 꺾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이들도 잘 따라줬다. 오후 운동이 끝나면 야간에 쉬어야 하는데 ‘재밌는 훈련이 있는데 한 번 해볼래?’라고 물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참가했다. 시간이 적은 만큼 코트만 빌려서 요점만 알려줬다. 3년 동안 척 퍼슨 코치한테 배운 걸 어떻게든 주입시켰더니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 척 퍼슨 코치는 항상 연습 계획부터 제대로 짜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을 성실히 따르려고 했다. 실전에서 통하니 뭐 기분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랬더니 중국과 인도와 경기는 모두 가비지 게임으로 승리했다. 뉴질랜드도 박살냈고 남은 건 호주뿐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겁을 먹기는 했다. 자기들이 호주를 어떻게 이기냐고 하더라(웃음). 내가 알려준 것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비록 패했지만 (이)현중이랑 (여)준석이는 같은 포지션의 호주 선수를 아예 끝장냈다. 재밌는 경기였다. 찰스(클래스크) 코치에게 빅 라인업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 그때 (김)형준이를 1번으로 두고 현중이, 준석이, (정)희현이, (이)두원이를 선발로 출전시켰다. 호주 아이들도 깜짝 놀라더라. 하하. 지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정말 재밌는 경기를 했다.”

현재 데이비슨 대학에서 활약 중인 이현중이 호주 NBA 아카데미로 가게 된 데도 역시 김효범의 도움이 컸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NBA 아카데미 부회장에게 이현중이란 보석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김효범은 “뉴질랜드와 4강 전날이었다. 코치들끼리 식사하는 자리에서 NBA 아카데미 부회장과 만나게 됐다. 정말 우연이었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다가 현중이를 소개했다. 200cm가 넘는 2번 자원이 있다고 말이다. 꼭 지켜봐달라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현중이가 뉴질랜드 전에서 16분 동안 3점슛 5개를 넣었다. 잠깐 사이에 아주 박살을 내놨다. 때마침 부회장이 나한테 오더니 NBA 아카데미에 데려오라고 하더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직접 소개도 시켜줬다. 통역을 해주려고 했는데 현중이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예전에 시애틀에서 잠깐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참 짜릿한 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 맨몸으로 떠난 미국, 험난했던 여정
꿈만 같았던 이벤트를 마친 김효범은 본격적으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억대 연봉을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김효범이 아닌 백수 김효범의 인생은 미래가 불투명했다. 기업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내에게 사직 이야기를 꺼내기도 힘들었다. 김효범은 “처음에는 아내(이혜원 씨)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참 용감했던 것 같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이미 직장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아내에게 그만두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내는 현명한 사람이다. 이미 NBA 코치의 초봉부터 여러 정보를 파악하고 있더라. 남편이 마음 상할까 직접 이야기는 안 하고 휴직을 선택했다. 아내의 선택이 옳았다. 미국에 갔지만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대학 졸업부터 한 다음에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하더라. 학비만 거의 1억 가까이 들었는데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아예 농구를 놓고 산 것은 아니었다. 뱅가드 대학에서 무급으로 코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수업을 마친 후 선수들과 따로 연락해 야간 훈련을 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과제와 시험의 연속으로 경기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결국 김효범은 2018년 5월 18일, 드디어 뱅가드 대학에서 졸업하게 됐다.

꿈꾸던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함께한 미국 생활은 행복했다. 선수 시절 매일 이어진 훈련, 그리고 경기에 쫓겨 제대로 된 신혼 생활을 즐기지 못했기에 더욱 애틋했다. 딩크족(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이었지만 아이에 대한 생각도 커졌다. 이혜원 씨는 어학원을 다니며 육아 자격증을 취득했고 김효범 역시 하루 4시간씩 육아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마냥 놀 수는 없었다. 김효범은 ‘나이키와 함께하는 제4회 아시아 태평양 팀 캠프’에서 인연을 쌓은 찰스 클래스크 코치에게 연락해 G-리그 코치가 될 수 있는지 문의했다. 2017년 8월에 미국으로 떠났던 김효범은 9월에 이르러 겨우 답을 받을 수 있었다. 9월 1주차부터 시작된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해 흔히 말하는 ‘인맥’을 쌓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G-리그 그랜드 래피즈 드라이브의 코치 선임까지 이어졌다.

“우연히 코치 면접까지 볼 수 있게 됐다. 근데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심지어 오랜 시간 한국에만 있다 보니 그렇게 잘하던 영어도 잘 안 되더라(웃음). 그런 와중에도 대성이를 홍보하기도 했다. 하하.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12월 말에 그랜드 래피즈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차 면접 때문이었다. 근데 면접 시간에 늦어버렸다. 12월 미시건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진다. 나는 어바인에 있었기 때문에 확 바뀐 계절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늦지 않으려고 사전 답사까지 다 했는데 면접 전날 눈이 너무 와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도 안 터지더라. 원래 15분 정도 가면 되는 거리를 45분 이상 헤매다가 결국 5분 정도 늦고 말았다. 구단 입장에선 결코 좋게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 동시에 면접을 보는 사람이 캐나다에서 12년 정도 감독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아내에게 ‘완전 망했어’라고 말했다. 계속 연락이 오지 않아서 결국 탈락한 줄 알았다. 근데 8개월 뒤에 디트로이트로 오라고 하더라. 당시 제프 밴 건디 감독은 물론 75명 정도의 스태프가 모두 그만두는 과정에서 새로 온 감독이 나를 좋게 본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카페에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 10일 안에 어바인을 떠나 디트로이트로 가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지만 아내가 전부 준비해줘서 간신히 모든 짐을 옮길 수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G-리그 코치로 선임된 김효범은 큰 꿈을 품고 디트로이트로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인생은 실전이었고 코치로서의 첫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를 만나다
디트로이트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한 김효범. 하지만 예상보다 엄격했던 내부 규율은 그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G-리그 코치들은 모두 타월을 들고 있어야 한다. 코트 바닥에 물이나 땀이 있으면 바로 가서 닦아야 한다.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에서도 정해진 규율을 지켜야만 자유가 주어진다. 또 위계 질서도 대단하다. 일단 말을 못한다. 바로 앞에서 블레이크 그리핀이 멋지게 덩크를 한 후 벤치로 와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먹 인사 정도였다. 그랜드 래피즈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했을 때는 분위기가 더 심했다. 사실 아시안이라서 더 그런 느낌도 받았다. 선수들한테 이런저런 조언을 해도 전혀 듣지를 않더라. 한 번은 아내에게 ‘애들이 말을 안 들어’라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또 코치 미팅을 하는데 첫 시즌이다 보니 정보력이 부족했고 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자신감 있게 해야 하는데 스스로 작아지더라. 지금은 편하게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엄청 떨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라이언 크루거 감독이 옆으로 빠지라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호텔 가서 울기도 했다(웃음). 임신 중이었던 아내에게 전화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 오히려 아내가 약해 빠졌다며 뭐라고 하니 기분이 나아지더라. 그렇게 하루, 하루를 버텼다.”

위태로웠던 김효범에게 있어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도니 틴들. 테네시 대학의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그가 그랜드 래피즈로 온 것이다. 사실 김효범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팀을 떠난 라이언 크루거 감독은 김효범에게 많은 관심을 주고 지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자 김효범은 아내에게 자신은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니 틴들 감독은 김효범과 최고의 궁합을 자랑했다. 김효범은 모비스 시절 배웠던 수비 전술을 분석해 자료로 만들었고 이에 감탄한 도니 틴들 감독은 그를 수비 전담 코치로 배정했다. 김효범은 위태로웠던 첫 시즌 이후 분명 달라졌고 성난 사자처럼 선수들을 조련하기 시작했다. 도니 틴들 감독 역시 그를 신뢰했고 그렇게 그랜드 래피즈를 최고의 수비팀으로 성장시켰다. 김효범은 “G-리그 역사상 한 시즌 최소 실점 기록이 99.7점이다. 우리의 목표는 100점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이었지만 잘 흘러만 간다면 기록을 깰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가능한 상황까지 왔었다. 99.8점까지 줄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가비지 게임에서 방심하다가 실점률이 높아진 적이 많아 아쉬웠지만 나름 수비에 대해선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이야기했다. 김효범이 주입한 수비 전술은 그랜드 래피즈를 넘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디트로이트는 도니 틴들 감독을 수비 전담 코치, 김효범을 육성코치로 올릴 예정이었다.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도니(틴들)도 자기가 디트로이트로 가게 되면 무조건 따라와야 한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사실 육성코치가 되면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어시스턴트 코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전력분석부터 선수 육성 등 내가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기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디트로이트라는 팀 자체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성사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로 인해 G-리그가 문을 닫자 김효범 역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오프 준비를 철저히 하며 우승을 바라봤던 그였지만 코로나19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갈 기회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김효범은 “도니는 현재 NJCAA 소속 치폴라 대학으로 갔다. 같이 해보자고 했는데 취업비자 발급이 어려워 거절했다. 연봉도 조금 아쉬웠다. 나중에 좋은 대학을 가게 되거나 다시 테네시로 돌아가게 되면 불러 달라고 했다(웃음). 그 전에 한 번 한국으로 온다고 하더라. 지금도 계속 연락 중인데 빨리 보고 싶다. 내게 있어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만큼 그립다”라고 말했다.

▲ 필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효범. 어쩌면 13년을 지내온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 편했을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김효범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선택했다.

“확실히 배우고 싶었다. 미국이 왜 농구를 잘하는지 몸으로 체험해보고 싶었다. 피지컬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배워보니 교육 방식의 차이가 크다. 미국은 농구를 못할 수가 없는 나라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필름을 통한 지도였다. 필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로 100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필름을 통해 자신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곧바로 코트에서 실행하면 학습효과가 다르다. 또 한국에선 4~5개월 정도의 비시즌 기간을 두지만 미국은 미니캠프가 2주 정도 된다. 패턴도 모른 채 그저 기본적인 것만 갖춘 선수들이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의 팀이 된다. 유재학 감독님도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다. 한국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결단이다. 미국은 몸 관리가 안 되어 있거나 훈련 태도가 좋지 않으면 바로 잘라낸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농구에 굶주린 선수들은 많지만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자극이 필요한 상황이다. 나 역시 미국에서는 스스로 식단을 만들어서 몸 관리를 했다. 아몬드를 갈아서 코코넛에 말아 먹기도 하고 닭가슴살이나 생선을 주로 섭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음주 문화, 밤 문화를 못 이겨낸 경험이 있다. 후회 없이 놀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불행 중 다행히 한국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대성이처럼 마인드가 단단한 친구가 많아졌다. 또 그들을 중심으로 몸 관리에 대한 부분을 철저히 하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새 건실한 지도자가 된 김효범은 지난 12월까지 삼성에서 단기간 육성코치로서 활동했다. 차민석과 같은 신인은 물론 1군에 들지 못한 2군 선수들을 주로 지도했다. 그는 “사실 KBL D-리그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소외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 안주한 채 살아가면 나중에 지금을 돌이켜봤을 때 굉장히 아쉬울 거라고 자신한다. 어떻게든 뭐라도 하나 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보통 야간에 훈련하곤 했는데 NBA 방식을 조금씩 섞었다. 선수들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따라줘서 재밌게 진행했다. (차)민석이는 아직 어린 아이지만 빨리 성숙해지고 싶어 한다. 과대 포장된 선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여기에 기술이 잘 흡수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 (김)준일이가 같이 훈련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관심 있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선수들은 나중에 크게 성공할 수 있다”라고 바라봤다.

김효범의 바람대로 현재 한국농구의 유망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전의식을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현중이다. 그리고 KBL에 진출한 차민석과 이준희, 여기에 한국으로 돌아와 고교무대를 평정한 여준석 등이 있다. 김효범은 “하나, 둘씩 해외 진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수들이 많아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꼭 해외 진출이 아니더라도 자기 개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선수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을 위한 내년 계획도 다 세워놨다. 좋은 기량을 가진 유망주들이 서로 경쟁을 하며 발전해 나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좋은 신체조건, 그리고 출중한 기량을 가진 어린 선수들이 정체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발전을 꿈꿨으면 한다”라고 바랐다.

김효범은 농구에 미친 사람이다. 그가 이토록 농구에 미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효범이 바라는 농구, 그리고 지도 철학은 대체 무엇이길래 지치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선수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파하지 않고 건강히 농구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평생 농구를 하면서 가졌던 여러 철학 중 가장 단단하고 강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언제든지 감수할 수 있다. 배움에 있어 선수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끔 나 역시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을 때 그 지름길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며 진심을 전했다.

▲ BONUS ONE SHOT.
김효범의 후배(?)가 될 뻔했던 양동근
김효범에게 양동근이란 존재는 매우 크다. 한국농구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기에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던 사람 역시 양동근이었으며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친구이자 형이었다.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 김효범은 모비스의 수비 전술을 그랜드 래피즈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양동근의 경기 영상을 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에 도니 틴들 감독 이 극찬을 했다고 한다. “(양)동근이 형이 은퇴하고 난 이후 우리 팀에서 지도자 연수를 할 계획이었다. 이미 여기서는 동근이 형을 알고 있기도 했다. 수비 전술에 대한 비디오 미팅에서 동근이 형의 영상을 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도니 역시 기뻐했다. 내심 걱정은 됐지만 도니는 ‘너도 처음에는 힘들지 않았냐, 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다음이 무섭지 않다’라며 힘을 주기도 했다. 계획이 다 짜여 있었는데…. 이 놈의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김효범의 말이다. 만약 계획대로 이뤄졌다면 양동근은 김효범의 후배 코치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미국에서 지낼 아파트부터 모든 것이 준비됐지만 아쉽게도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김효범은 “너무 아쉽다. 동근이 형과 같이 하게 되면 굉장히 재밌었을 것이다. 동근이 형도 편했을 텐데…. 아직도 너무 아쉬운 일이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사진_점프볼 DB(유용우 기자)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