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의 강화일기] 진강산을 오르며 숨을 고른다

한겨레 2021. 1. 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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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의 강화일기]

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내가 태어난 집은 산 아래에 있었다. 여섯살 때까지 그 산에서 사계절을 보냈다. 봄에 언니들은 냉이를 캤다. 나는 진달래를 따 먹고 전쟁놀이를 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아래에서 구슬치기를 하였다. 가을에는 나무를 하러 가는 언니들을 쫓아다녔다. 겨울에는 산속 냇가에서 얼음을 깼다. 비료 포대를 그 위에 깔고 미끄럼을 탔다. 뒷동산에는 무덤이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그 무덤은 얼음썰매놀이에 최고였다. 동네 어린이들은 죄다 모였다. 어린 동생을 엎고 나온 여섯살 친구도 있었다. 장갑도 없었다. 겨울 파카도 없었다. 털 부츠가 웬 말인가. 나는 막내 오빠가 신다가 물려준 운동화를 신었다. 헐어서 다 떨어져도 창피한 줄 몰랐다. 헌 스웨터 소매가 누런 코를 윤이 나게 닦으며 놀았다. 손이 꽁꽁 얼어 벌게져도 추운 줄 몰랐다.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엄마들이 저녁 먹으라고 하나둘 이름을 불렀다. “개똥아, 소똥아, 말똥아.” 아이들은 관심도 없었다. 엄마들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놀지 못해 분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뛰었다.

겨울을 좋아한다. 추울수록 좋다. 하늘이 파랗고 공기는 맑다. 하얀 눈이 올 때는 아이가 된다. 3월부터 11월까지 진드기 때문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에 갈 수가 없었다. 진드기 방지 목걸이를 해주고 약을 발라도 붙었다. 진드기는 집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산책은 논두렁으로 다녀야 했다. 날이 추워지고 산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오후 3시, 감자가 낑낑대며 나가자고 보챈다. 물병에 물을 채우고 잠바를 입는 동안 감자와 당근이는 흥분해서 뛰어다닌다. 감자가 먼저 당근이 귀에 소리를 ‘꽥’ 지른다. 때로는 당근이의 뒷다리를 물며 시작한다. 당근이도 감자의 귀를 문다. 당근이가 도망을 가고 감자가 쫓는다. 감자가 도망을 가고 당근이가 쫓기도 한다.

대문을 연다. 옆집 사는 개가 알아보고 반가워 짖어댄다. 이 개는 이름이 없다. 그냥 불리는 게 이름이다. 오리고기 말린 간식을 준다. 환장을 하며 먹어치운다. 건넛집에 사는 손오공이 달려온다. 오공이는 묶여 있지 않은 개다. 눈이 회색이고 귀가 쫑긋하다. 꼬리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 작업실 창으로 보면 손오공은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또 금세 다른 데서 놀고 있다. 저러다가 교통사고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다행히 차를 잘 피해 다닌다. 동네 사람들은 손오공이 집 마당에 와서 똥을 싸고 간다고 못마땅해한다. 나는 그런 녀석이 밉지 않다. 우습고 귀엽다. 언제부터인가 녀석은 우리를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끝까지도 아니고 오다가 사라지곤 했다. 역시 손오공은 제멋대로다. 온갖 자유는 혼자 누린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진강산에는 소나무가 많다. 솔잎이 가득 쌓인 길은 향이 좋다. 솔잎은 소리를 차단해주는 역할도 한다. 아늑하다. 지난 1년 반 동안 진강산은 주택단지 개발로 먹혀들어가고 있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가 널려 있다. 조금 올라가니 접시와 컵, 주방용품이 버려져 있다. 이곳까지 올라와서 버리고 간 사람들의 머릿속은 무엇으로 차 있는 걸까? 산에는 무덤이 많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은 어김없이 죽은 자의 자리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산 중턱의 꽤 넓은 면적의 나무들이 깎이고 잔디가 심어진 것을 보았다. 그 안에 새로운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은 언제부터 개인의 소유가 된 것일까? 언젠가 스위스의 레만 호수 길을 따라 걷는데 호수 앞에 들어선 저택들 때문에 계속 갈 수가 없었다. 저택의 앞부분 호수가 그들 개인 소유라고 했다. 호수도 사고판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산속을 걷다 보면 당근이는 숲속의 여우 같다. 감자는 다람쥐 같다. 당근이는 솔잎색이고 감자는 나무색이다. 먼저 올라간 녀석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가파르다. 바위가 많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햇살 덕분이기도 하다. 매일 보는 바위의 모양과 색은 닮았지만 다르다. 아름답다.

정상에 오르니 마니산이 작게 보인다. 확 트인 풍경이 답답한 마음을 열어준다. 산책은 자아와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다. 산을 오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저 풍경 때문이리라. 땀으로 등이 축축하다. 늘 낮은 자리에 있는 당근이와 감자도 높이 올라 풍경을 내려다본다. 냄새를 맡는다. 바람을 느낀다. 환하게 웃는다. 2021년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일상에서 산책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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