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했던 라소다를 추모하며
[스포츠경향]
토미 라소다는 1927년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서전 ‘위대한 야구(Artful dodgers)’에서 라소다는 “우리 집에는 항상 가난이 풍족했다”며 “결코 끼니를 굶은 적은 없다. 다만, 먼 훗날로 미뤄놨을 뿐이다”라고 적었다. 라소다는 구두를 닦았고, 채소를 팔고, 철로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군복공장에서 다리미질을 했고, 굴뚝청소를 했고, 제일 자신있던 ‘싸움’과 ‘야구’를 했다.
1945년 필라델피아와 계약했다. 드래프트가 없던 시절, 계약금없이 월 100달러의 조건이었다. 라소다는 “2차세계대전으로 선수들이 징집되는 바람에 내가 프로무대에 들어설 틈바구니가 생겼다”고 했다. 1948년 현금 4000달러에 다저스로 트레이드 됐다. 다저스와 ‘평생가약’을 맺던 순간이었다.
마이너리그 라소다는 야구보다 싸움의 달인이었다. 넘치는 에너지로 상대팀과 시비 붙기 일쑤였다. 하루는 라소다가 마이너리그로 내려온 베테랑 버스터 메이너드를 상대로 3구 연속 빈볼을 던졌고, 다시 한 번 몸싸움이 벌어졌다. 메이너드가 경기 뒤 라소다를 찾아 “도대체 내가 당신한테 무슨 잘못을 했나”고 묻자 라소다가 답했다. “중학교 2학년때 1년 내내 교통봉사대를 해서 간신히 메이저리그 경기 관전 기회를 얻었는데, 당신이 그때 사인 요청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를 밀치고 지나갔죠.”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것은 1954년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경기 등판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앨스턴 감독을 찾아가 따졌다. “제가 응원단장이나 하려고 여기에 온 줄 아십니까. 저를 왜 불러 올렸습니까.” 앨스턴 감독은 “네가 벤치에서 소리를 깩깩 지르는게 우리한테 꼭 필요해. 그러면 우리 팀 분위기가 살아나거든”이라고 답했다. 라소다가 다저스에서 뛴 이닝은 모두 합해 13이닝이지만 1955년 이후 다저스가 명문팀이 되는데 라소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라소다는 “나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기 위해서는 역대 최고의 좌완이 필요했지”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샌디 쿠팩스다.
라소다는 1960년부터 다저스의 스카우트로 일했고 1966년 루키 리그 감독을 시작으로 라소다 감독의 인생이 시작됐다. 1973년 다저스의 3루 코치가 된 뒤 1976시즌 막판, 앨스턴 감독의 은퇴와 함께 다저스의 감독이 됐다. 라소다를 응원단장으로 쓴 바로 그 앨스턴 감독이었다. 라소다는 다저스 감독으로 통산 1599승1439패를 이뤘다. 1996년 심장마비를 겪으며 은퇴한 라소다는 ‘한번도 잘리지 않은’ 몇 안 되는 감독으로 남았다.
1988년 월드시리즈 우승은 라소다를 다저스의 아이콘으로 만든 결정적 장면이었다. 1차전 막판 장염과 다리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커크 깁슨이 대타로 나와 극적인 역전 끝내기 홈런을 때렸다. 중계 화면은 오른 주먹을 흔들며 절뚝거리는 깁슨과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라운드로 뛰어 나오는 라소다 감독을 비췄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 ‘야구 전도사’였다. 라소다 감독이 말한 “내 몸에는 다저스의 파란 피가 흐른다”는 야구의 오랜 명언 중 하나로 남았다.
1978년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패배 뒤 인터뷰는 라소다의 열정을 상징하는 일화다. 취재진이 이날 홈런 3개를 친 컵스 데이브 킹먼에 대해 평가해달라고 묻자 라소다가 이렇게 답했다. “킹먼에 대한 내 의견? XX, 완전 개똥같은, 홈런 3개나 친 그 XX한테 평가라고? X같은 경기하고 홈런 3개 처맞고 졌는데, 그런 XX에 대해 평가하라고?”
라소다의 솔직한 열정이 그의 인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여전히 다저스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 하나다. 2017년 휴스턴과의 월드시리즈 6차전이 끝난 뒤 라소다가 기자회견장을 찾았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라소다를 보고 끌어안으려 하자, 라소다가 오른손으로 로버츠 감독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런 X같은 세리머니는, 내일 경기 이기고 나서 해.” 그때 못한 ‘X같은 세리머니’가 지난 가을, 드디어 이뤄졌다. 93세의 라소다는 텍사스의 홈구장 글로브 라이프 필드를 찾았고, 우승 확정 뒤 로버츠 감독과 뜨겁게 포옹했다.
라소다는 얼마 뒤 LA 인근의 병원에 입원했다. 상태가 호전됐다는 소식이 이따금 들렸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퇴원 뒤 집에서 쉬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얼마 뒤인 현지시간 7일 오후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1994년 다저스에 입단해 라소다 감독과 부자(父子)처럼 지낸 박찬호는 인스타그램에 “마음이 무겁고 슬픔이 깊어지는 건, 그가 내게 준 사랑과 추억이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때 인연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2003년 이승엽의 48호 홈런을 대구구장에서 지켜 본 라소다는 그때 인터뷰에서 “세상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홈런이었다”며 “10년 안에 메이저리그에서 수많은 한국인 선수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긴 한 마디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야구는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스포츠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했던, 토미 라소다. 향년 94세.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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