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경자년스럽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을씨년스럽다.
이번 연말연시는 을씨년스럽다.
1905년 을사년이 이런 분위기였을까? 얼마나 스산하고 우울했으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까지 생겼을까? 하지만 적어도 을사년에는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을씨년스럽다. 이번 연말연시는 을씨년스럽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 나는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 서울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지리산에 들어와 있다. 설날까지는 숨죽이고 있어야 할 것이다.
1905년 을사년이 이런 분위기였을까? 얼마나 스산하고 우울했으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까지 생겼을까? 하지만 적어도 을사년에는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일제와 그 부역자들에게 1905년은 승리였다.
2020년에는 누가 승리했는가?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인류 전체가 각기 다른 정도로 지고 있다. 방역에 성공했다는 대만과 뉴질랜드 같은 섬나라도 전지구적 경제 침체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은 12월 들면서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 2020년은 그저 경자년스럽다. 전례가 없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백신이 유통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종식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체념했다. 코로나가 잡힌다고 해도 언제 또다른 역병이 창궐할지 모른다. 인간이 지금처럼 자연을 식민화하고, 동물을 착취하면 코로나, 사스, 메르스, 에볼라 같은 바이러스는 계속 나타날 것이다. 아니면 산불, 기근, 폭우, 해수면 상승 등 이상기후가 발생할 것이다. 코로나는 기후생태위기의 예고편이자 전초전이라 보는 게 맞다.
정부와 언론은 작금의 사태를 전쟁에 비유한다. 맞다. 우리는 지금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코로나가 없어진다고 끝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에 창궐하여 식생을 잠식하고 기후 및 생태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바이러스는 바로 인간이다. 이미 전체 척추동물 중 36%는 인간, 60%는 인간이 먹기 위한 가축, 나머지 4%만이 야생동물이다.
우리는 자연과 전쟁 중이고, 당연히 지고 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살행위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 이후, 무한한 승리와 진보로 달려왔다고 믿었던 인류가 사실 제 무덤을 파고 있었고, 패배와 후퇴로 접어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이 전쟁은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모두 싸우기를 포기했다.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멈추니 다들 뭔가 문제가 있다고는 느낀다. 둔감했던 이들도 확실히 세월이 수상하다고 걱정한다.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세계 탄소 배출이 7% 줄었다. 더 큰 싸움을 위해 홍역을 앓는 것일지도 모른다. 100년 전 대공황이나 세계대전처럼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다. 사실 경자년은 그 이상이다. 인류가 인류세를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자각한 첫해가 아닐까 싶다.
과학자들이 ‘인류세’라는 말을 처음 쓴 건 20년 전이다. 지구의 지질시대를 새롭게 구분해야 할 만큼 인류의 영향력, 정확히는 파괴력이 도드라졌다는 뜻이다. 약 1만1천년 전 시작된 홀로세는 안정된 기후 덕분에 농경과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인류세는 홀로세의 조건을 상실해가는 시대다.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위험하다. 그 타격을 처음으로 전인류가 체험한 것이 코로나였다. 근대 문명이 신명 나게 정복했던 자연이 역습을 개시했다. 인간의 폭력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걸 멈추고 집에 있다. 으스스하다. 을사조약 이후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내는 등 나름 저항했지만, 결국 5년 뒤 나라를 빼앗겼다. 불가역적인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7년이다. 그 안에 탄소 배출 넷제로를 달성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재앙이 온다. 그런데도 아직 석탄발전소를 지으면서 2050 넷제로를 운운하는 이들은 을사오적보다 파렴치한 기후악당으로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학습지 방문교사도 소상공인 버팀목자금 신청할 수 있나요?
- 듀스 김성재 죽음에 얽힌 진실을 말하자면…
- 부산·서울 일부 교회들, 금지 지침에도 대면예배 강행
- 어차피 따로 나갈 안철수-오세훈, 왜 만날까?
- 보궐선거 앞두고 ‘성누리당’ 오명 덧씌워질까…국민의힘 ‘비상’
- “공무원이 괜찮다고 했는데”..구청장 단체 식사 식당에 불똥
- AI 이루다 성적 악용 논란에 이재웅 “서비스 제공한 회사가 문제”
- 검찰, 정인이 양모에 ‘살인죄’ 적용 무게
- 민주당 “4차 지원금 ‘선별’이 우선…‘전국민’ 지급도 배제 안 해”
- ‘빚투’ 다시 과열 조짐…금융당국 경계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