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 칼럼] 트럼프 사태에서 배운것 세가지

노원명 2021. 1. 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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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하는 짓을 보면 로마를 불태운후 누각에 올라가 리라 반주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는 네로의 일화가 생각난다. 이 일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전설일 뿐이다. 트럼프는 폭도를 선동해 민주주의 성전인 미국 의회를 '강간'했다. 그 과정에서 다섯명이 죽었다. 민주주의가 활활 불타고 있을때 트럼프는 네로가 리라를 켜듯 트윗질을 해댔다. 이것은 전 세계에 중계된 역사적 사실이다.

 폭군·혼군은 제국 몰락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진행된 단계에서 출현한다. 미국은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팍스 아메리카나가 기어코 무너진다면 트럼프는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네로가 맡은 것과 동일한 배역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나는 트럼프 사태를 보며 세가지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지도자는 인격이 전부다

 2016년 미국 대선때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당선됐을때 나는 나쁘지 않다고 봤다. 오바마 8년을 거치며 미국 민주당은 너무 좌경화됐고 미국은 나약해졌고 그것이 세계와 한국에 미칠 영향이 걱정됐다. 트럼프가 지향하는 세계는 미국 우선주의와 중국에 더 큰 몽둥이를 든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한국에 불리한 측면과 유리한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통제할수 있는 세상이 한국의 근본적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다만 꺼림칙한 것은 트럼프의 '인티그리티(integrity)'였다. 인티그리티는 한국어로 맞춤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 개념인데 '통합적 인격'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세상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특히 대통령이라는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 대통령은 상식에 기초해 판단해야 하고 일의 경중을 구분할줄 알아야 하고 분노의 포로가 되지 않아야 하며 본인의 오류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하고 선택의 기로에서 역사를 참고할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티그리티다.

트럼프 집권기간이 늘어날수록 '이 사람은 인티그리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는 김정은 푸틴 시진핑의 절대권력을 부러워했다. 경멸해야 할 상대에게서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저열한 인격의 전형이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격과 덕성을 지녔지만 지도자로서는 무능했던 사람들이 역사에는 무수히 많다. 이것은 인격이 지도자의 충분조건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격이 형편없으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 사례는 단언컨대 단 한건도 없다. 인격미달 지도자는 본인과 세상을 파탄시킨다. 히틀러를 보라. 역사에서 예외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트럼프의 함량미달 인격에 확신을 갖게 된 2020년 대선에서 나는 그의 낙선을 조바심치며 기원했다.

■간신은 어디에나 있다

 트럼프 사태에서 놀라운 대목중 하나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 인간들이 트럼피즘의 노예로 오랫동안 복무했다는 사실이다. 부인을 제외한 여성과는 단 둘이 식사하지 않을 정도로 금욕주의적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의 부정선거 선동에 대꾸 한번 안하다 막판에야 마지못해 돌아섰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몇차례 감동적인 연설로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정의'를 강론한바 있는 그가 보스의 불의에는 '쫄보'처럼 우물쭈물했다.

 펜스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대선이후 모든 언론이 바이든 승리를 선언한 상황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로의 순조로운 전환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대선불복을 국무장관이 뒷받침한 꼴이다. 폼페이오는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수재다. 그런데 그런 헛소리를 한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인한테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펜스와 폼페이오는 차기 대선을 노리고 있다. 트럼프 팬덤의 계승자가 되길 원한다. 출세 욕망앞에 믿음과 지성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인간들. 우리는 그런 인간형을 간신이라고 부른다. 간신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나 있다. '멀쩡하게 생긴 인간이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나' 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간들은 대한민국에도 많다.

■대중은 사실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트럼프가 4년 임기를 꼬박 채웠다는 것이다(남은 10여일간 탄핵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심지어 재선될뻔 했다. 여전히 거의 절반에 가까운 미국인들이 그를 지지한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지율 40%는 깨졌지만 열렬 지지층은 결속하고 있다. 지금은 정부에 대한 실망이 10%대, 혹은 한자릿수 지지율로 연결되는 시대가 아니다. 과거 여론이 순수한 도덕적 분노로 움직이던 시대가 있었다. 스캔들이 정권 지지율에 즉각 영향을 미쳤고 드러난 '사실'이 민심을 견인했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접하던 과거에는 싫건좋건 확인된 사실을 중심으로 의제가 굴러갔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실이 본인의 생각과 다르면 사람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유튜브와 인터넷 공간은 이 불편한 마음을 다독이는 수많은 '대안적 사실들'로 차고 넘친다. 이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미국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철석같이 믿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즐겨보는 유튜브 방송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한때 보수진영에서 지식인 소리를 들었던 인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몇달째 음모론을 퍼 나르고 시청자들은 '아멘'을 외친다.

 나는 이 유튜버의 최초 동기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구독자가 곧 돈이며, 구독자를 끌어모으는데는 사실보다 음모론이 몇배 유리하다는 것을 안다.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한 지금은 본인이 생산한 음모론에 스스로 취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방송 한편에 수백 수천개의 찬양 댓글이 달리는데 어지간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주가 된듯 우쭐해질 것이다.

 우리는 희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트럼프는 끝났으되 트럼프적 인간형은 계속 늘어만 간다. 그런 인간형을 걸러낼 대중의 분별력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유튜버 세계의 교주들이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고 있다. 이런 교주들이 생산한 대안적 사실들이 소비되는 시대에는 객관적 선과 도덕적 당위라는 것이 없다. 그저 난립하는 세계관이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가장 득보는 것은 무능력자와 위선자, 사기꾼 그리고 독재자들이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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