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회색 캔버스 위에 흰색으로 쓴 시간의 궤적.. 존재를 기록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어릴 적 2차 세계대전 겪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 시작
20대엔 모래시계서 영감 받아
모래를 시간의 조각으로 표현
과거·현재 구분 안 돼 아쉬워
1965년부터 숫자 적는 작업
'1965/1-∞' 프로그램 시작
첫 작품은 1~35327까지 써
검정 캔버스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회색으로 작업
말년엔 흰색 위에 흰색 숫자
표는 7,777,777이었지만
5,607,249를 끝으로 마무리
새해가 밝았다. 지난한 한 해를 보낸 것이 기쁘다. 상황이 이른 시일 내에 정리되고 개인적인 삶도 더 나아질 것 같다. 여행과 모임 등으로 사람과 함께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이렇게 설레는 상상을 하다 문득 한 살 더 나이 먹는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며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이럴 때마다 좋은 조언을 건네는 작품이 있다. 로만 오파우카(Roman Opałka, 1931∼2011)의 작품이다.
오파우카는 작가로 사는 평생 온몸으로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1965년 캔버스에 1을 쓰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숫자를 그렸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궤적을 남기는 동시에 자기 존재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높이 평가받아 전 세계 곳곳에서 선보였다. 국내 전시에도 다수 참여해 관람객을 만났다. 작가는 더 세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사랑받는다. 깊은 감동과 강한 울림을 주어 우리를 깨운다.
# 시간을 그리는 작가, 로만 오파우카
오파우카는 1931년 프랑스에서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체험하는 성장기를 보냈다. 전류에 따라 가족이 폴란드에서 독일로 추방당하는 일을 겪었다. 전후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머물렀다. 고국 폴란드에 귀국한 이후에야 안정적인 생활을 찾았다. 흥미를 느끼고 있던 미술 공부도 시작할 수 있었다.
오파우카는 일찍부터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재능을 보였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로 선전물 제작을 위한 미술 교육이 대세였다. 자연스럽게 그래픽 학교에 진학했고 여기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대도시 우치와 수도 바르샤바로 유학을 떠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우치와 바르샤바의 학교는 상대적으로 순수 미술에 비중을 두고 수업했다. 선전물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아쉬움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다. 1965년 바르샤바의 한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중이었다. 점을 대신해 아라비아 숫자를 캔버스 가득 적어 넣는 아이디어였다. 아라비아 숫자는 일련의 숫자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되었고 ‘1965/1-∞’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5년에 시작해 1부터 무한대로 숫자를 써나간다는 의미다.
‘1965/1-∞’ 프로그램은 같은 해에 국립 젊은 회화 전시에서 선보여졌다. 높은 호응을 일으켰고 ‘젊은 폴란드 화가상’을 오파우카에게 안겼다. 그는 이후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해 국제 미술계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 등 유수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토큐멘타 6 등 주요 미술 행사에도 등장했다.
‘1965/1-∞‘ 프로그램은 프로젝트나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프로그램은 어떤 목적을 두고 지침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오파우카는 작업에 규칙을 정해두고 일관적 논리와 과정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프로젝트는 숙고를 통해 고안한 하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시리즈는 유사한 사건, 사물을 연속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프로젝트나 시리즈라고 이름 붙이지 않은 이유다.
오파우카의 작업 규칙은 그가 쓴 선언문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196×135㎝의 동일 크기의 캔버스 위에 1부터 무한대에 이르는 수의 점층적인 전개 과정을 손으로, 붓으로, 흰색으로, 매번 약 1%씩 밝아지는 배경 위에 써 내려간다. 언젠가는 흰색 위에 흰색으로 글씨를 쓸 순간이 올 것이다. 작업실에서 하루의 작업을 마감하는 순간 나는 진행 중인 캔버스를 배경으로 내 얼굴 사진을 찍는다. 각 캔버스 작업은 숫자를 쓰면서 동시에 그것을 읽는 내 목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1965/1-∞(Detail 4875812∼4894230)’는 이러한 말년 작업 중 하나다. 멀리서 작품을 보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옅은 회색빛 캔버스가 있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고민하며 화면의 가까이 걸어가 본다. 그리고 화면의 전반을 가만히 보면 숫자가 쓰여 있음을 알게 된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서 시작한 숫자는 4875812다. 그 옆에는 4875813, 4875814, 4875815, 4875816… 과 같이 연속하는 숫자가 쓰였다. 화면의 우측 하단을 마무리하는 숫자는 4894230이다. 숫자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기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수십년 같은 일을 하면서 한순간에도 소홀하지 않은 작가의 태도가 보인다.
그는 이렇게 인생의 대부분을 숫자를 그리며 살았다. 첫 작업에는 검은색을 칠한 바탕에 흰색 물감으로 숫자를 썼다. 1부터 35327까지의 숫자가 대비를 이루며 화면을 가득 메웠다. 1972년 마침내 숫자 1,000,000을 적었다. 이후부터는 시간의 흐름을 더 잘 표현할 방법을 하나 더 적용했다. 새로운 캔버스를 칠할 때마다 배경색에 약 1%의 흰 물감을 섞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회색에 흰색의 숫자를 썼고 말년에는 흰색에 흰색으로 숫자를 적었다. 배경과 숫자의 구별이 불가능한 상태를 작가는 ‘잘 번 흰색’이라 불렀다. 그가 젊은 날 세운 목표 숫자는 7,777,777이며 마지막으로 쓴 숫자는 5,607,249다.
오파우카의 작품은 화면에 숫자를 채워 시간의 궤적을 기록한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 점점 희미해지는 숫자의 존재를 보여준다. 언젠가는 그 존재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존재가 흐려지는 모습은 세월이 지나며 늙어가는 나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오파우카의 작업에서는 쓸쓸하거나 슬픈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숭고하고 고결한 정신이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수행자처럼 존재와 흔적을 기록한 작가의 삶이 보여서다.
오파우카의 작업은 사라지는 나의 존재 상태를 마주하게 만든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영원하지 않은 인간으로 사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시간을 어떻게 살고 기록할지 고민해보라 말을 건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간 속에 내 존재가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김한들 큐레이터·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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