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헤로인은 '미친 짓'" 손가락질에도..그들은 왜

이승환 기자 2021. 1. 10.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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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복용자 사이 팽배
결국 '집유 중 또 마약' 황하나씨 사례 되풀이
집행유예 기간 중 또다시 마약을 투약했다는 의혹을 받는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 황하나씨가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2021.1.7/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벌써 10년 전 일이 됐다. 지금도 기억난다. 누더기를 걸친 듯한, 군청색 히피 차림의 50대 남성이 '위드'(weed)를 건넸다. 하얀색 얇은 종이로 담배처럼 돌돌 만 그 안에는 말린 대마잎이 가지런히 담겼다. 위드란 영미권 국가에서 대마초를 의미하는 은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동행한 취재원이 기지를 발휘해 모면했다. "이 친구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마약을 권하지 마세요. 그냥 구경삼아 온 거예요." 히피 차림의 남성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국내 모 시사주간지 런던 통신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은밀하게 이뤄지는 '마약 복용 실태'를 잠입 취재하고 있었다. 런던 외곽 지역에 있는 무허가 건물 안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10대로 추정되는 남녀 5~6명 가운데 1명이 백색 코카인 가루를 만지작댔다. 앳된 얼굴의 무리는 차례로 얼굴을 들이댄 뒤 들숨으로 가루를 흡입했다.

격렬한 사운드의 록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한 남성은 진흙이 뭉개진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렸다. 마약 복용자 사이에서도 '최악의 마약'으로 꼽히는 헤로인을 흡입한 듯했다. 남성을 에워싼 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헤로인은 정말 미친 짓이야, 쯧쯧."

이 건물에는 최소 100명이 모였고, 백인·흑인·유색인종 모두 있었다. 연령대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말쑥한 캐주얼 정장도, 요란한 레게머리도 보였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술주정뱅이와 달리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기자는 전날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곳을 취재했다. 실제로 폭력적인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아드레날린이 분비돼 격하게 행동하는 것과 다르긴 했다.

마약 복용자 대부분이 어딘가 늘어진 모습이었다. 현장도 '쿵쾅쿵쾅' 야단법석이 아닌 '습기'처럼 눅눅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저마다 체험하는 환각의 실체까지는 취재할 수 없었다.

수사기관에서도 마약 복용을 '피해자 없는 범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복용 현장에 있는 모든 이가 사실상 피해자처럼 다가왔다.

마약을 권유해 확산시키며 새로운 피해자가 생기는 식이었다. 연인을 비롯한 지인이 준 마약을 '호기심'에 받았다가 마약에 의존하게 된 사례가 상당 수다. 히피 차림의 남성이 건넨 '위드'를 받아 입에 문 순간 기자도 '중독' 피해자가 됐을 수 있다.

대마초를 포함해 중독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마약을 흡입하다가 더 '강력한 것'에 호기심을 느껴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대마초 상습 흡입자가 더 자극적인 코카인에 빠져 중독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벌레가 피부에 기어 다니는 듯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코카인은 유엔(UN) 마약위원회가 규정한 고위험 마약류다. 코카인 경험 후 독감의 수 백배 고통을 감수해야 끊을 수 있는 헤로인에 빠지기도 한다.

대마초→코카인→헤로인 식으로 더 '센' 마약 찾게 된다는 의미다. 학계에서는 이를 '징검다리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기자가 잠입 취재한 현장은 징검다리 이론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 꼭대기에 다다르면 돌이키기 어려운 순간을 맞이한다.

남양유업 창업주의 손녀 황하나씨(33)가 집행유예 기간 마약을 투약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그와 함께 마약을 복용한 혐의를 받던 남편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숨졌다.

황씨의 지인도 같은 혐의로 수사대상에 올랐다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생존했으나 중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인은 국내 최대 마약 조직 '바티칸 킹덤'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마약이 범죄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마약 중독자들이 치료와 자활의 대상인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이들에게는 신경정신과 진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마약을 찾게 됐어요." 기자의 잠입 취재를 도왔던 취재원은 이렇게 털어놨다. 환각보다 불면의 세계가 더 견디기 어렵다는 호소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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