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미안해' 물결의 함정.. 감성 정치 매몰 안 돼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2021. 1. 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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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후 경기 양평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을 찾은 추모객들이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16개월 영아 정인(가명)양을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입양아 정인이를 전 국민이 애도하고 있다. 지난 일주일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군 ‘정인아 미안해’ 해시태그(#) 운동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미안해 챌린지 물결이 자칫 ‘감성 정치’에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인이를 추모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행동하는 방식이라기보다 보여주기식 캠페인에 그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거부감이다.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이 ‘정인아 미안해’라고 쓰자 많은 이들이 “그럴 시간에 아동학대방지법이나 빨리 처리하라”는 반응을 보인 이유다. 정치가 할 일을 감성이 가린다는 것이다. 아동정책은 아동의 피눈물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이번에도 현실이 됐다. 정인이가 숨지고 나서야 국회는 아동학대방지법을 일사천리로 심사했다. 21대 국회는 이전까지 이 법안들을 한 차례도 심사한 적이 없었다.

온 국민이 나서서 미안해한다고 무엇이 바뀌느냐는 지적도 있다. 물론 이런 감성적 캠페인이 사태의 파급력을 급속도로 키워 지도층이 움직이도록 압박하는 효과는 있다. 다만 이것이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해야 할 주체를 역설적으로 뒤로 숨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실질적인 책임 소재 문책과 제도 개선이 병행되도록 끝까지 추이를 지켜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현재 정치권의 행태는 요주의 상태다. 정인이 애도 흐름에 발맞춰 경쟁적인 법안 발의에 나섰지만 상당수가 지난 20대 국회에서 나온 것과 중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여론 잠재우기식 무더기 입법으로 현장의 혼란을 부추긴다”며 정치권의 ‘숟가락 얹기’ 발의를 비판했다.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이른바 '정인이법'이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8일 서울 양평 경기 양평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 정인(가명)양의 묘소에 한 시민의 편지가 놓여 있다. 여야는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의결할 예정이다. 뉴스1
사실 이번 정인이 사태도 법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사람, 시스템, 국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아동복지법이 개정되면서 학대아동의 분리·보호 정책이 세워졌지만 아직도 학대당하는 아이들 84%(2019년 기준)가 정인이처럼 집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있는 법도 제대로 못 지켜 아동학대 참극이 반복되는 현실에서 매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는 건 비극을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것일뿐인지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데에 아이의 참상을 도구로 쓰기도 한다.

정인이 이름이 계속 부각되는 등 피해자의 비극이 과도하게 조명된다는 점도 이 해시태그 운동을 우려스럽게 보는 시선 중 하나다. 피해자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하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든다는 이들이 많다. 정인이 사건이 일반에 재조명된 계기인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정인이 편 방송을 비롯해 많은 언론들이 채 두 살도 안 된 아이가 어떻게 학대 당했는지 등을 필요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 마디로 옐로 저널리즘(원시적 본능을 자극하는 선정주의적 경향의 보도)이다.

친부와 양모에 의해 벌어진 ‘영훈이 남매 학대 사건’(1998년), 양모가 8세 딸을 학대 끝에 장 파열로 죽게 하고 열두 살 언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칠곡 아동학대 사망사건’(2013년), 초등 2학년 딸을 주먹과 발길질로 갈비뼈 16개를 부러뜨리고 부러진 뼈에 장기가 찔려 피하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한 ‘울산 서현이 사건’(2014년), 사전위탁 기간 양부모에게 학대 당해 온 몸에 멍이 든 채 심정지 상태에 이른 4살 ‘은비 뇌사·사망 사건’(2016년) 등 정인이 사건을 제외해도 알려진 굵직한 아동학대만 이 정도다.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왜 비슷한 패턴으로 아동학대가 계속 일어나는지 파고들어 실질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할 때가 아닐까.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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