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민주주의 뒤튼 태국 군부와 왕실의 제휴
⑦ 태국 짜끄리 왕조
쇄국 일관해 망한 다른 나라와 달리
태국 왕실, 근대화 앞장서 독립 유지
1932년 혁명 때 왕정 위기 맞았으나
인민당 내부 갈등 탓 왕 권위 유지돼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과
반공주의 선전 목적 미국이 손잡고
1950년대말부터 국왕 힘 키워줘
왕의 군사정권 옹호에 화난 시민들
지난해부턴 '왕정 개혁' 요구 시작
노래 ‘섈 위 댄스’가 흐르고, 화려한 금실 자수 문양이 빛나는 실크 재킷과 바지를 걸친 왕은 아들의 영국인 가정교사와 춤을 춘다. 19세기 초 태국(타이) 왕실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 <왕과 나>(1956)의 명장면이다. 냉전에다 매카시 선풍과 무관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실제 모델인 짜끄리 왕조 라마 4세 몽꿋(1804~1868)은 태국 근대화의 명군(名君)으로 각인되었고, 태국 왕실은 반공의 보루이자 왕국 안녕의 주춧돌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태국을 휩쓴 1999년 <애나 앤드 킹>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두 영화 모두 세계적으로 흥행했지만 정작 태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신성한 왕이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이유다.
소녀시대의 케이팝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지고,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한국산 물대포를 맞아가며 손가락 세개를 펼친 손을 높이 쳐든다. 2020년 10월부터 본격화한 태국 민주화 시위의 풍경이다. 시위대는 “왕정(King-dom) 말고 자유(Free-dom)”를 드러내놓고 주장한다. 예전의 태국 민주화 시위가 군사정권 퇴진과 문민 민주화 두가지 요구를 내세웠다면, 이젠 ‘국민의 일치된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는 왕실을 향해 군주제 개혁을 주장한다. 왕실과 군사정권이 한통속이라는, 그동안 꾹꾹 눌러온 금지된 말을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위대가 손가락 세개를 펼치는 이유다.
진보 요새인 탐마삿대학 설립한 쁘리디
서구에 의한 동남아의 근대는 왕정을 분해했다. 그렇다고 왕실이 민주주의와 양립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는 식민지배와 제국주의의 거센 압박과 두차례의 세계대전, 냉전을 거치며 태국에서 뒤틀리게 됐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 몽꿋 왕이 개방적이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한 덕분에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왕국의 주권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절반의 사실이다. 서구문화와 무역 개방에 보수적이었던 조선 왕조나 중국의 청조,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 일본의 막부 세력에 비교하면, 19세기 태국의 짜끄리 왕조는 외교와 현실정치에 일찍 눈을 떠 식민지의 위기에서 벗어난 표본처럼 여겨졌다. 기실 몽꿋 왕은 서구 열강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였고, 영화 속의 어린 왕자 라마 5세 쭐랄롱꼰 왕은 노예제를 폐지하는 등 전근대적 적폐를 없애기도 했다. 태국 시민에게 왕실이 애증의 관계라면, 라마 4세와 5세의 치세는 요즘의 증오와 대비되는 ‘과거의 존경과 사랑’일 수 있다.
서구의 근대는 약탈만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민족주의의 이념도 전파했다. 식민지화는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짜끄리 왕조는 근대의 이념까지 막진 못했다. 1932년부터 태국 인민당의 주도로 입헌군주제 개혁이 진행됐다. 하지만 절대왕정의 태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다던 군부 엘리트의 초심은 군부독재의 샛길로 빠졌다. 태국 왕실은 오직 군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존경과 사랑’을 무기로, 정당성 없는 군부 쿠데타를 승인함으로써 여전히 통치하는 왜곡된 입헌군주의 길을 걸었다.
인민당은 1932년 6월24일 왕정 타도의 깃발을 들고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군부를 대표하는 피분 송크람(1897~1964)과 문민 엘리트 쁘리디 파놈용(1900~1983)이 이끌었다. 태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왕실 근위대 장교 피분은 파리 유학 중에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쁘리디를 만났다. 피분과 쁘리디가 라마 7세(1925~1935) 치하의 무능과 부패를 개혁하자며 1926년 파리에서 모임을 만든 것이 인민당의 모태가 됐다. 하지만 1932년 왕정 타도의 결과는 ‘무늬만 입헌군주제’였다. 왕의 재가 없이는 법을 제정도 개정도 할 수 없었다.
인민당의 군부와 민간 엘리트의 결합도 이내 깨졌다. 피분과 쁘리디는 왕정 타도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어떤 공화국을 만들 것인지에 관해 의견이 갈렸다. 은행 국유화, 사회보장서비스와 복지의 확대 등 경제 개혁을 주장한 쁘리디는 인민당 주류인 군부 우파의 비판을 받고 혁명 1년 만인 1933년 정계를 은퇴했다. 34살의 재야 지도자 쁘리디는 탐마삿대학을 세웠다. 라마 7세가 왕령으로 금지한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르치는 대학을 세워 우민화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이다. 지구촌의 배낭여행자들의 거리인 방콕의 카오산로드와 짜오프라야강 사이에 위치한 탐마삿대학은 개교 이래 태국 진보주의자의 요람이자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왕실 눌렀던 초기 군부 지도자 피분
피분과 쁘리디의 결별로 태국은 군부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혁명 이후 수립된 입헌군주제 정부의 초대 총리는 법률가 출신에게, 두번째 총리는 군인 출신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육군 수장이었던 피분이 세번째 총리가 되면서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전야인 1938년 총리가 된 피분은 왕정의 유산을 없애고 타이족 중심의 국민국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피분의 ‘문화명령’(랏니욤)의 제1명제가 국명을 왕정의 상징인 ‘시암’(Siam)에서 타이족의 나라를 뜻하는 ‘태국’(Thailand)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의 국가주의 노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가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동남아 대부분의 신생국가에서 추구한 첫번째 어젠다였지만,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태국에서는 더 일찍이 대두된 셈이다. 피분의 국가주의 아래 노출이 심한 의상이 금지되고, 국산품 애용이 권장됐으며, 태국의 국가(國歌)와 상징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의 ‘조선학운동’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2차대전 전후 암울한 시기에 있었던 약소국가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과 열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동질감마저 느껴진다. 피분은 태국 국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잃어버린 영토 회복’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대동아 전쟁을 “아시아를 아시아인에게로”(Asia for the Asiatics)라는 슬로건으로 미화시킨 일본과 손을 잡고는 연합군에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태국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유명한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일본군 포로수용소가 태국에 있었던 이유다. 파시즘과 손잡고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비난으로 피분은 1944년 총리직에서 사직했다.
반면 쁘리디를 주축으로 한 ‘자유 타이’(세리 타이)는 연합군의 편에 섰다. 자유 타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을 통해 군사훈련을 받고 무기나 전투 물품을 지원받았다. 태국과 미 중앙정보국의 밀월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자유 타이는 막상 전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자유 타이의 주축을 이뤘던 민간 정치인과 군 장교들은 기존의 군부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친일에서 친미로 바뀌었지만, 군부의 세력은 그대로였다. 냉전기 태국 군부의 정치적 급성장에는 미국의 기여가 컸다.
전략사무국 출신 미국인들도 2차대전이 끝난 뒤 반공친미의 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태국을 대표하는 영어신문 <방콕 포스트>를 창설한 알렉산더 맥도널드, 영화 <왕과 나>의 의상을 담당하여 태국 실크를 전세계에 알린 ‘타이 실크 컴퍼니’의 짐 톰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쁘리디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자신들의 사업도 확장했다.
전후 쁘리디가 문민 총리에 올랐지만, ‘150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1946년 라마 8세가 자신의 침실에서 총격당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쁘리디는 군부 세력의 집중포화를 맞아 국왕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빈자리는 1947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장악했고, 피분이 이듬해 총리에 복귀했다.
다시 정계 복귀에 성공했지만 젊고 혈기 왕성한 친미파 정치군인들 사이에서 피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이를 직시한 그가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쓴 전략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태국군을 보내 미국을 돕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결국 태국은 한국전쟁에 참전 선언을 한 첫번째 아시아 연합국이 되었고, 미국 군수품으로 무장한 태국군은 그해 겨울 남한에 도착했지만 살을 에는 한국의 겨울에 경악했다. 피분 정권은 또, 미 중앙정보국 첩보원들과 공조해 태국에 특수경찰과 반공 첩보조직을 만들어 미국의 냉전 전략에 협조했다. 그 대가로 태국은 막대한 미국의 원조와 차관을 얻어냈다.
하지만 피분은 국왕에 관한 입장에서 미국과 이해를 달리했다. 그는 독재자였고 파시즘을 신봉했지만, 나폴레옹처럼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타이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족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왕실을 대중의 눈과 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선전하는 데 ‘국왕’만큼 효과적인 상징은 없다고 생각했다.
푸미폰 왕을 국민영웅 만든 쿠데타 세력
1946년 왕위를 계승한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이 유학을 마치고 1950년 영구 귀국했다. 피분이 왕의 귀국을 반기는 시늉을 하기는 했지만, 피분의 눈치를 봐야 했던 왕족들은 예전처럼 화려한 축하 행진을 벌일 수도 없었고, 외국 손님을 환영하는 공식행사를 열 수도 없었다. 1957년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는 그랬다. 사릿은 왕실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속셈이었다. 젊고 잘생긴 푸미폰 왕과 미모의 왕비 시리낏이 문화사절단이자 외교관의 역할을 맡아주길 바랐다. 사릿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갓 서른이 된 푸미폰 왕은 정치력이라고 할 만한 힘이 없었고, 대중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 사릿이 통치했던 7년은 부활의 기간이었다.
푸미폰 왕은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재즈를 즐기고, 눈 덮인 스위스 산자락에서 어머니와 스키를 즐기던 왕족이었다. 짜끄리 왕실의 직계 후손인 그는 태국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릿이 사망한 뒤에도 군부 독재자들과 손잡은 푸미폰 왕은 태국의 개발과 통합의 중심이자 시골의 가난한 촌부부터 도시의 젊은 화이트칼라까지 모두 사랑하는 ‘우리의 왕’(나이루앙)으로 숭앙됐다. 건국의 아버지를 뛰어넘은 근대화의 아버지, 태국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몽꿋 왕에 버금가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2016년에 서거한 그를 향한 애도가 아직도 이어진다. 그러나 푸미폰 왕의 70년 치세엔 군부독재의 그림자가 길고도 짙다.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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