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신해철의 최고 문제작 '마이셀프(Myself)'

홍장원 2021. 1. 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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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오브락-174] 널리 알려진 대로 신해철의 가수 생활 시작은 발라드를 부르는 아이돌이었다. 강변가요제에 들고 나갔다 떨어진 '슬픈 표정 하지말아요'란 곡으로 가요톱텐 문을 두드린 그는 '귀공자' 같은 외모로 소녀팬들 인기를 독차지하며 1위 트로피를 수집하는 대형 신인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앨범 커버 사진이 커피 잔을 들고 우수에 차 있는 모습이라는 건 당시 신해철이 가요계에서 어떤 감성으로 소비됐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도유망한 20대 초반의 잘생긴 청년이었지 지금과 같은 '마왕'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속곡인 '안녕'은 경쾌한 댄스 음악에 파격적인 장문의 '영어 랩'이 들어가 있어 인상적이었지만 이 역시 사회 비판적이거나 깊은 성찰을 요하는 그런 류의 곡은 아니었다.

그런데 신해철은 탄탄한 성공을 딛고 한껏 자신감에 차있던 두 번째 앨범 준비 기간에, 일종의 각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신해철은 "트로피를 드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며 회고했다. 일부러 받은 트로피를 빙빙 돌리며 트로피 가치를 일부러 깎아내리려는 행동도 보였다. 방송가에선 '신해철이 건방지다'는 얘기도 솔솔 흘러나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사는 절대 갑, 가수는 절대 을이었다. 방송사는 가수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강자였다. 신해철은 그런 구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수에게 호령하는 방송 시스템을 거부하고 싶었다. 신해철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캐릭터였다. '신해철 이 자식 건방지네'라는 얘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방송국 생태계 틀을 깨고 싶은 그의 마음도 커져갔다. 그리고 그는 무한궤도라는 록밴드로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탄 록커 출신이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 성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앨범부터 그는 방송에서 원하는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기로 아마도 결심했을 것이다.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류의 말랑말랑한 노래를 내면 얼마든지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그래서 나온 두 번째 앨범 제목은 마이셀프(Myself), 타이틀곡 제목은 재즈카페였다. 앨범 작사·작곡·편곡까지 모두 신해철의 손을 거쳤다. 따라서 이 앨범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모두 신해철이 기획하고 작업한 것이다. 재즈카페 가사를 보면 신해철이 익숙한 사랑 노래로 타이틀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특유의 저음 랩으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는 이렇게 흐른다.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 데이 까만 머리 까만 눈의 사람들의

목마다 걸려 있는 넥타이 어느 틈에 우리를

둘러싼 우리에게서 오지 않은 것들

우리는 어떤 의미를 입고 먹고마시는가

빨간 립스틱 하얀 담배 연기

테이블 위엔 보석 색깔 칵테일

촛불 사이로 울리는 내 피아노

밤이 깊어도 많은 사람들

토론하는 남자 술에 취한 여자

모두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못 본 체하며

목소리만 높여서 얘기하네

흔들리는 사람들 한밤의 재즈 카페

하지만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이 앨범은 지금 들어도 깜짝 놀랄 만한 신해철의 수준 높은 성찰이 곳곳에 들어있다. 당시 신해철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스스로 아이돌의 굴레를 깨고 나와서 그가 오랫동안, 록만큼이나 애정이 보이며 천착했던 세련된 테크노 감성을 앨범 전체에 흩뿌려 놓았다.

'길 위에서' '50년 후의 내 모습'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가사는 주옥같다.

특히 길 위에서는 신시사이저를 제대로 잘 쓰면 얼마나 곡이 웅장하고 심지어 거룩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라 하겠다.

차가워지는 겨울바람 사이로 난 거리에 서 있었네

크고 작은 길들이 만나는 곳 나의 길도 있으리라 여겼지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어가다 나의 눈에비친 세상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었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나의 첫 깨어남이었지

난 후회하지 않아 아쉬움은 남겠지만

아주 먼 훗날까지도 난 변하지 않아

나의 길을 가려 하던 처음 그 순간처럼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의 길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그대여 날 지켜봐주오

신해철은 이 앨범을 내놓고 변집섭과의 컬래버레이션 앨범 이후 곧바로 넥스트를 결성해 그의 고향인 밴드 세계로 돌아간다. 넥스트 시절 보여줬던 사회 비판적인 가사, 현실 참여적 자세 등은 그의 두 번째 앨범 '마이셀프'로 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신해철의 1집은 예쁘장한 외모로 발라드를 부르는 신인 가수라는 상품성에 충실했다면 2집에서는 각성한 신해철이 앨범 타이틀 대로 '나를 돌아본 뒤' 이후 밴드를 결성해 나 이외의 얘기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이 앨범에 실린 '50년 후의 내 모습'은 현시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곡이다. 당시 20대의 신해철은 50년 후 70대가 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했다.

주름진 얼굴과 하얗게 센 머리칼

아마 피할 순 없겠지

강철과 벽돌의 차가운 도시 속에

구부정한 내 뒷모습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더 적을 그때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월에 떠다니고 있을까

노후연금 사회보장 아마 편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신해철은 뜻밖의 의료사고로 70대는커녕 향년 46세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더 적을 그때'를 보지 못하고 50이 되기전에 눈을 감았다. 마이셀프 앨범이 나온 게 1991년 어느덧 새해 기준으로 꼭 30년 전이 됐다. 그는 30년 전 서울 어딘가 길을 걸으며 '차가워지는 겨울바람 사이로 난 거리에 서 있었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길 위에서'를 썼을 것이다. 2021년 한파가 몰아치는 새해 한겨울에 그가 쓴 가사가 다시 회자된다. 그가 본 30년 뒤의 2021년 중년의 신해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훌륭한 뮤지션이 남긴 흔적에 그에 대한 그리움도 다시 커져간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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