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다리를 안전하게 뛰라는 세상

김명희 입력 2021. 1. 9. 10:04 수정 2021. 3. 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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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법 문제를 이해하려면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원인, 그리고 20여 년 전 시작된 '기업살인법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제 국회가 답할 차례이다.
ⓒ시사IN 신선영2020년 11월24일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의 한 업체에서 29세 노동자가 폐기물 분쇄혼합기에 끼여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12월1일 정문 앞에서 직원들이 이동하고 있다.

딱 이맘때였다. 2018년 12월27일, 국회의 회기 만료를 앞두고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안이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해 12월10일에 터진 비정규 노동자 김용균씨의 안타까운 사망, 유가족의 애타는 호소, 노동자와 시민들의 성난 목소리가 빗발친 후에야 겨우 가능했다.

하필이면 추운 겨울날, 산재 유가족들이 또다시 국회 앞에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법)을 2020년 연내에 입법하라고 말이다. 민주당은 대표가 나서서 입법을 약속한 것만도 벌써 여러 차례다. 정의당은 선제적으로 법안을 발의했다. 좀처럼 호응할 것 같지 않았던 국민의힘도 입법 취지에 동의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여론의 호응도 크다. 그런데 어쩐지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법안의 ‘위헌적 요소’ ‘과도한 엄벌주의’ ‘영세사업장 적용의 비현실성’ 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논평과 기업들의 불평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연구자로서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기업살인법 운동’의 진화를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을 가능케 한 동력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 딱 두 달 전이다. 논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아니라면 중대법을 둘러싼 논란을 따라가기 어렵다. 예컨대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다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것일까?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든가, 중대법에서 소규모 사업장을 제외하자는 요구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원인, 그리고 20여 년 전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기업살인법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한국에 빈번한 ‘재래형’ 산재

한국은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재래형’ 산재가 많다. 국제노동기구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작업장 사고로 인한 노동자 사망률이 10만명당 5.81명이다. OECD 회원국 평균인 2.61명의 2배가 넘는다. 한국에선 산업재해 사망자의 53.6%가 사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 비율이 국제적으로는 13.7%에 그쳤다. 다른 나라의 산재 사망 원인 중 직업병(사고가 아니라)이 특별히 많아서가 아니다. 그 나라들이 적어도 사고성 산재 사망은 어느 정도 예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성 산재의 대부분인 추락, 끼임, 부딪힘 등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간단한 안전장치와 실천으로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사고다. 한국의 작업장에서는 이 간단함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2010년 9월7일, 충남 당진 ‘환영철강’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29세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숨졌다. 청년은 용광로가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용광로 위의 고정 철판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 난간 설치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이런 ‘재래형’ 산재의 대부분은 노동시장이나 공급사슬의 말단에 있는 하청업체,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집중된다. 김용균씨가 사망하기 전 5년 동안, 국내 화력발전소 산재사고의 97.7%가 하청 노동자들에게 일어났다. 사망사고의 희생자 20명은 모두 하청 노동자였다. 오랫동안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른 답이 없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었다.

산재가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게 된 것은 사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오랫동안 산재는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사건, 경제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개인적 비극, 불운 등으로 치부되곤 했다.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어도 구조적 원인 분석이나 사회적 공론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고용과 임금 문제가 워낙 중요하다 보니 노동조합에서도 안전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기 어려웠다. 강한 노동조합이 있으면 사정이 낫다. 그러나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영세사업장과 하청업체일수록 노동조합 결성은 어렵다. 사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이중 노동시장이야말로 산재의 구조적 원인이다. 임금과 고용안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위험까지 철저하게 이중화되어 있다.

물론 원청 기업들도 안전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규직이 15~20일 걸려 할 수 있는 일을 하청 노동자들에게 10일 만에 끝내도록 요구하면서 안전을 강조한다면, “외나무다리를 빨리 뛰어가라고 하면서 안전하게 뛰어가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했던 노동인권 활동가는 작업장 내부의 빡빡한 공정 때문에 “안전이고 뭐고 사실상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일하다 사고가 나면 ‘노동자의 안전 불감증’이 원인이라고 한다.

앞서의 논문을 준비하며 만난 활동가는 ‘산재가 왜 이렇게 반복될까’라는 질문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화이트칼라가 죽는 거 봤냐?” 맞는 말이다. 만일 대학교수가 1년에 900명씩 연구실에서 사망한다면, 대기업과 공기업의 관리직·전문직 종사자들이 매일 3명씩 산재로 사망한다면 이 문제가 이렇게 방치되었을까?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가 죽으면 ‘보상금 5000만원’이 거의 관행처럼 통용된다. 정규직의 3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으로 “죽음마저도 그렇게 헐값”이다. 반복적인 재래형 산재사고의 본질은 불평등 문제다.

ⓒ연합뉴스대형 화재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 코리아냉동 임직원들이 2008년 1월12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 동료 시민의 인간 된 도리

기업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에 노동자들도 개별적으로 맞서기 어렵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건강권 보호는 물론 공정한 시장질서를 세우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재의 책임을 크게 추궁하지 않는다. 그나마 사고가 실제로 많이 발생하는 영세사업장에는 제정 이후로도 오랫동안 적용되지 않았다. 산재가 무수히 반복되도록 만든 일등공신은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2020년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화재 이후 새삼 조명된 2008년 코리아냉동 물류창고 화재 사건을 돌이켜보자. 무려 4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엄청난 재해였다. 하지만 회사와 최고경영자는 산업안전보건법, 형법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각각 20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현장 관리자와 감독관은 집행유예로 8~10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0명 사망에 총 벌금 4000만원. 한 사람의 목숨값은 어림잡아 100만원이다. 벌금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항소가 제기되었으나, 법원에서 기각했다.

이제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지난해 노동건강연대는 KBS의 의뢰를 받아 2018~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문 671건을 전수 분석했다. 자연인(528명)의 평균 벌금액은  458만원, 법인(584개)은 505만원이었다. 부상자 없이 노동자가 1명 사망한 경우, 자연인 피고인은 평균 513만원, 법인 피고인은 533만원을 선고받았다. ‘목숨값이 10년 동안 그래도 5배 올랐다(2008년 코리아냉동 물류창고 화재 사건 대비)’고 박수를 치기는 이르다. 부상자 없이 노동자 4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자연인 피고인의 평균 벌금액이 500만원, 법인 피고인이 1500만원인 것을 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체 자연인 피고인 1065명 중에서 금고와 징역 등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총 21명으로 전체의 1.97%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수감 기간은 금고와 징역 모두 합해 9.3개월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판결에서 사업주보다는 현장의 안전보건관리 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했다. 이 실무자들이 실제 잘못된 ‘행위를 한’ 책임자이고, 사업주는 양벌규정에 따라 ‘간접적인 행위자’로만 처벌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벌 수준이 낮고 책임은 아래로 전가되니, 재발의 억지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개별 기업 처지에서 볼 때 재해는 드문 사건이지만 예방 시스템 구축엔 비용이 들어간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예방조치를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 결정이다. 비용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지는 지점이다.

중대법 제정 요구가 나타난 이유다. 2003년, 시민단체인 노동건강연대는 선로 보수작업 중이던 비정규직 노동자 7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살인’이라는 구호를 외쳐왔다. 2006년부터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여러 노동단체들이 모여 매년 ‘살인기업 선정식’을 가졌다. 그해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거나 중대한 산재사고를 일으킨 기업들을 지목하는 행사였다.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망신을 당하고 나면 기업들이 산재에 주의를 기울일 것 같다. 그러나 신기할 정도로 단골 수상자 명단이 바뀌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법률 개정 없이 산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12년부터 연구조사를 진행했고, 산재사망 처벌강화 특별법과 산재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 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끝났다.

하지만 시민들이 변하고 있었다. 2008년 시작된 반올림운동은 피해 노동자의 아픔과 대기업의 책임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2013년 5월 현대제철소에서 아르곤 질식으로 하청 노동자 5명이 사망했을 때에는 〈조선일보〉와 〈매일경제신문〉이 나란히 “대기업 연쇄 産災(산재), ‘기업 살인’으로 처벌해야 정신 차릴 건가” “産災사망 원도급업체에 엄한 책임 물어라” 등의 제목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연합뉴스2020년 4월27일 산재사망대책마련공동캠페인단 주최로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2015년 중대법 제정 위한 연대 결성

2014년 세월호 참사, 2011년 이후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피해 등의 공론화로 노동자 안전에 대한 기업의 책임 문제가 시민과 소비자의 안전 이슈로까지 확장되었다. 중대법 논의가 ‘노동’ 의제에서 ‘사회적’ 의제로 확장되었다. 마침내 2015년엔 중대법 제정을 위한 ‘제정연대’가 결성된다. 2006년 살인기업 선정식 준비 과정에는 노동건강연대, 매일노동뉴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노동 관련 단체와 진보정당만 참여했다. 2015년의 제정연대에는 416연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안전사회시민연대 등 22개 단체가 모였다.

이 같은 노동·시민 연대와 대중의 여론은 실질적인 사회변화를 이끌어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으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 아무개씨가 사망하자 ‘이례적으로’ 사업체에 벌금 3000만원이 부과되었다. 원청기업인 서울메트로도 조사를 받았다. 2013년 성수역, 2015년 강남역 등에서 거의 똑같은 유형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기업의 과실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벌금도 직원 안전교육 부실을 이유로 부과된 30만원이 전부였다. 2018년 겨울의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안 통과 역시 이러한 사회운동의 성과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대법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이 의사결정 책임자인 법인·이사·원청에 대한 형사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지만, 법사위에서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지금도 경총, 중소기업사업주, 일부 전문가들은 중대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한목소리로 외친다.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산재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당한 말씀이다. 노동·시민사회단체들과 유가족들도 중대법이 만병통치약이라서 입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업살인법이 도입된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영국 등은 선진국 중에서도 노동안전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나라들이다. 노동자 안전으로 정평이 난 북유럽 복지국가들에는 이런 법률이 없다. 영국의 법학자 폴 아몬드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안전 규제가 미흡했기 때문에 결국 형법을 통해 산재사망 문제에 대한 규범을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중대법은 하나의 분기점이다. 최소한 기업 측이 계산기를 두드렸을 때 안전에 투자하는 비용과 벌금을 부담하는 비용이 균형을 맞추도록 하자는 시도다.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면, 이것 말고도 좋은 해결책이 이미 있다면 왜 여태까지 그 좋은 방법을 안 썼는지 도리어 묻고 싶다.

■ 작은 사업장 노동자 목숨 중요치 않나

중대법의 영세사업장 적용을 유예하자는 주장도 규제의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선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가장 취약하고 산재 위험도 높은 노동자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와 뭐가 다른가? 산재 문제는 결국 불평등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영세사업장에 필요한 것은 적용 유예가 아니라, 이들이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들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1기 세월호 특조위 연구에 참여했던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의 유족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가장 큰 치유의 약은 뭐냐? 딱 하나라고 보거든요. ‘그 죽음으로 인해서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고 당신 자녀의, 당신 이웃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어. 우리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고 이렇게 바꾸었어’라고 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일 거 같아요.”

산재 유가족들,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차가운 천막을 떠나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동료 시민들의 인간 된 도리가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리고 이제 국회가 스스로에게 답할 차례이다. 노동자와 시민들이 왜 이런 법을 요구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김명희 (예방의학 전문의·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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