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주도한 가네코 후미코의 묘, 문경에 안장된 사실을 아시나요?

배소영 입력 2021. 1. 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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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

후미코는 1903년에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소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열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한 후미코의 뜻에 따라 박열의 형 박정식씨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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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여사.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다. 국내에선 박열의 아내로 더 유명하다.

후미코는 1903년에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소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집을 나섰다. 이맘때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9살 때 조선 충북도 청주군 부강면에 있던 고모부 이와시타의 집에 맡겨졌다. 그는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올랐다”고 한다.

후미코는 1922년 3월 박열과 만났다.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에도 가입했다. 같은해 11월에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흰 저고리를 입고 출두한 후미코는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박문자”라고 말한다. 1926년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그는 “만세”를 외쳤다.

후미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혼인했다. 이후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돼 복역하다가 같은 해 7월23일 향년 23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

박열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한 후미코의 뜻에 따라 박열의 형 박정식씨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미코의 유해는 그렇게 문경읍 팔영리 박씨 집안 선산에 묻혔다가 2003년 박열의사기념관이 들어선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

경북북부보훈지청은 이달의 우리지역 현충시설로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박열의사기념관은 박열의 생애 및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리고자 2012년 10월9일 개관했다.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아나키스트로서의 의열투쟁 활동 및 강제 구금 이후 재판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등을 상세히 관람할 수 있다.

경북북부보훈지청 관계자는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아 가네코 후미코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했다.

문경=배소영 기자 sos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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